『제국의 위안부』마저 ‘망각’하는 박유하

지난 328일에 도쿄대학 고마바(駒場) 캠퍼스에서 제국의 위안부평가를 둘러싼 토론회가 열려 나도 발표자로 등단했다(추기 참조). 토론회에서는 여러 의미에서 흥미로운 발언을 접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쓰고자 한다.

 

그런데 이 토론회 개최에 앞서 박유하가 자신의 facebook에 나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게재했다. 지금까지보다 한술 더 뜬 우스꽝스러운 반론을 전개하고 있어 소개하고 간단히 의견을 남겨 둔다.

 

박유하는 내가 제국의 위안부부정확하게 요약해서 비판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하며 그 구체적인 예로 도로 노리카즈(泥憲和)에 의한 아래의 지적을 인용한다(읽기 쉽도록 적당히 행을 바꾸었다).

 

나는 한국어판을 읽지 못하므로 일본어판에 입각해서 서술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만 보면, 정영환 씨의 비판 수법은 미리 제국의 위안부를 완전히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한 후에 그 결론에 맞춰 이런저런 단편을 끌어맞추고 있으며, 게다가 부정확한 인용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례를 들면,

 

    정영환 씨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 원문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과 연민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병사의 관계가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견을 배반하는 차별을 내포하면서도.”

 

구조적기본적으로, 그리고 ‘ ’가 붙은 동지적 관계가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동지적 관계로, 더욱이 한 문장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영환 씨는 왜곡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도로 노리카즈는 이렇게 내가 제국의 위안부원문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도로가 나의 제국의 위안부한국어판 인용을 일본어판 인용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아마도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해서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사를 쓴 시점에서는 아직 일본어판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어판에서 인용했다. 도로가 읽은 책과 기술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구조적기본적으로, 그리고 ‘ ’가 붙은 동지적 관계가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동지적 관계로, 더욱이 한 문장이 삭제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박유하 자신이 일본어판 출판 당시에 그렇게 개정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고 도로가 느낀다면 그 비판은 박유하 자신에게 향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박유하는 내가 제국의 위안부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는 비난이 실제로는 자신한테 향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도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명백히 끌어낼 수 없는 주장을 자작의 요약이라고 제시하며 비판자의 오독을 비난하는 놀랄 만한 반론법을 반복해 왔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스스로가 일본어판에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지조차 망각해 버린 것이다. 일종의 재능이라고 해야 할까.

 

추기

 

이전에도 썼지만, 한국에서는 교수 직위가 아니어도 전임직 대학교원을 교수라 부르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어쩌면 비전임직에도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경험상 시간강사였을 때 교수라 불린 적은 없다). 한겨레등의 신문에서 내 직함(준교수)교수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이러한 습관 자체는 어떨까 싶지만, 적어도 일본어판 번역 기사에서 어쩔 수 없이 직위를 쓸 필요가 있을 때는 정확히 게재해 주기를 바란다.

 

(정영환)

정영환 저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 선전(번역)

【선전】졸고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世織書房, 2016)에 대해서

 

 이달 말에 졸저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이 세오리 서방에서 간행됩니다. 지난 1년 반에 걸쳐 블로그나 논문에서 써온 『제국의 위안부』 비판 논고를 대폭 가필, 수정한 것인데, 반 이상은 새롭게 썼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와 예찬론의 주장을 각각 검증했는데, 본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 왜소화, 피해자들의 '목소리'의 자의적인 이용, 일본의 '전후보상'에 대한 잘못된 근거에 기초한 높은 평가 등의 치면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자세한 것은 글 말미에 첨부된 목차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자인 박유하 씨나 옹호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은 모두 오독에 의한 것이라고 반론하지만,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본서를 '오독'한 것이며, 피해자들의 분노에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정도까지 문제가 많은 본서를 '양심적'인 책으로 치켜세운 일본의 언론계의 지적 퇴폐입니다. 왜 대부분의 일본 미디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외무부장관 '합의'를 환영하며 위화감을 표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열렬히 소녀상 '철거'를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걸까요. 그 사상적인 배경을 추적하기 위해서도 『제국의 위안부』의 등장과 일본 언론계의 예찬 현상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책이 『제국의 위안부』가 초래한 혼란과 안이한 '화해'론을 바로잡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부디 직접 읽어 주십시오.

 

 3월 19일 Fight for Justice 주최 심포지엄 「'위안부; 문제와 현대 한국: 한일 '합의'의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판매를 개시합니다. 서점에는 늦어도 월말에는 진열될 예정입니다. 가격이나 주문방법 등 자세한 것은 첨부한 선전물을 봐 주십시오.

 

(정영환)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세오리 서방, 2016)

목차

1 『제국의 위안부』, 무엇이 문제인가

 1.'평화의 소녀상'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2.『제국의 위안부』란 무엇인가

 3.『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일본의 지식인

 4.『제국의 위안부』 비판의 방법과 과제

2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일본의 책임

 1.『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책임을 물었는가?

 2.『제국의 위안부』의 역사수정주의 '비판'의 특징

 3.『제국의 위안부』의 일본군 책임 부정의 '논리'

 (1)'수요・묵인' 책임론, 업자주범설

 (2)'수요・묵인' 책임론의 오류

 (3)군의 '좋은 관여'론

 (4)'국민동원'론과 '자발적인 매춘부'론의 공존

 (5)'성노예'설 비판의 문제점

 (6)미성년자 징집의 경시와 페미니즘 담론의 차용

 (7)일본의 법적 책임과 군의 범죄

 4.정신대 이해이 혼란

 (1)하타 이쿠히코 '여자정신대근로령 미적용'설의 수용과 몰이해

 (2)'정신대=자발적 지원'설과 '민족의 '거짓말''론

3 왜곡된 피해자들의 '목소리'

 1.『제국의 위안부』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가?

 2.센다 가코 『종군위안부』의 오독에 의한 '애국'의 조탁

 (1)'애국'적 존재론

 (2)일본인 '위안부;=조선인 '위안부'?

 3.'병사들의 목소리'의 복권과 '동지적 관계'론

 (1)후루야마 고마오와 '병사들의 목소리'

 (2)부정론자의 담론과 '동지적 관계'론

 4.'여성들의 목소리'의 왜곡과 찬탈

 (1)증언의 왜곡

 (2)증언의 찬탈

4 한일회담과 근거 없는 '보상・배상'론

 1.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아들일 기회를 빼앗은 것은 한국정부였다?

 2.'1965년 체제'와 『제국의 위안부』

 (1)'1965년 체제'의 동요

 (2)헌법재판소 이해의 오류와 아이타니 논문의 오독

 3.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

 (1)'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을 '말소'한 것은 한국정부?

 (2)'경제협력'은 '전후보상'이었다?

 (3)재조선 일본 재산과 개인청구권

5 고노 담화와 국민기금 그리고 식민지 지배 책임

 1.『제국의 위안부』는 식민지주의를 비판했는가?

 2.고노 담화와 국민기금은 '식민지 지배 문제'에 응답했는가?

 (1)고노 담화와 식민지 문제

 (2)국민기금의 '위로금'은 실질적 보상이었다?

 (3)쿠마라스와미가 일본정부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3.식민지주의로서의 '제국의 위안부'론

 (1)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전쟁 문제로 왜소화?

 (2)식민지주의로서의 '제국의 위안부'론

 (3)'책임자 처벌'의 부정과 천황의 전쟁책임

 4.『제국의 위안부』와 '두 개의 역사수정주의'

6 맺음말: 망각을 위한 '화해'에 저항하며

참고문헌

자료1 한일 외무장관 공동기자회견 발표문(2015년 12월 28일)

자료2 『제국의 위안부』 한국어・일본어 목차 대조표

자료3 『제국의 위안부』 출판 금지 해당 부분(34곳)과 일본어판의 표현

자료4 박유하 씨의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

자료5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입장

자료6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자료7 아시아여성기금 사업 실시 당시 작성된 총리의 편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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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伝】拙著『忘却のための「和解」 『帝国の慰安婦』と日本の責任』(世織書房、2016年)について : 日朝国交「正常化」と植民地支配責任

【강연】「『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일본의 지식인」/ 정영환

2월 27일(토) YMCA에서 있었던 '한일 '합의' 문제 연속기획 심포지엄에서 정영환 씨의 강연에 대해 보도한 조선신보의 가사를 소개합니다.

 

【강연】「『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일본의 지식인」/ 정영환

'위안부'둘러싼 한일 갈등의 지양 · 화해를 도모

 

일본의 지식인에 의한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예찬이라는 현상은 한일 '합의'가 이본사회에서 환영받는 토양 구축에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박유하 씨의 이름이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위안부' 피해자ㄷㄹ 9명이 박유하 씨의 저서로 명예를 침해당했다고 하여 기소한(2014년 6월)①출판금지 가처분과 피해자들에 대한 접근금지, ②손해배상청구(민사) ③명예훼손에 의한 형사소성이라는 세 가지 재판이다. 재판이 일본 매스미디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짐으로써 그 후에 출판된 일본어판「제국의 위안부」가 주목받게 되었다.

 

재판의 결과로는 작년 11월에 피해자들의 고소에 대해 한국 검찰이 박유하 씨를 재택기소했고, 저서 내용 중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정과 원고 1인 당 약 100만 엔, 총 약 900만 엔의 손해배상 명령이 내렸다.


이 책의 모티프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타이틀에 나타나 있다. '제국'이란 대일본제국을 가리키며, 조선, 타이완 같은 당시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던 대일본제국의 '신민'인 여성들은 요컨대 중국, 동남아시아 각국의 여성들과는 달리 '애국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일본군과 '위안부'들은 전쟁수행에 협력하는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하여 여성들을 일본군의 협력자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의 54명의 연구자들은 한국의 검찰에 의한 박유하 씨의 재택기소에 대해 항의 성명을 발표하여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무엇보다도 이 책에 의해 위안부 여러분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라고 하여 적극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로 피해자가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것은 오해라는 입장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의 책임을 추궁했는데도 책 내용이 잘못 전달된 탓에 고소당했다, 따라서 재택기소는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즉, 책의 내용을 둘러싸고 이해가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물은 비판적인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항의 성명에는 이른바 우파, 보수파 논쟁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에 대해 추궁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이름을 올렸다.
예를 들면 작가 나카자와 게이 씨는 이 책에 대해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함이 숨겨져 있다.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접근방법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급했다.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전쟁범죄라는 틀 속에서 파악되었는데 식민지주의 문제로 까지 확대하여 책임을 추궁한 책이라는 견해이다.

 

군뿐만 아니라 업자도 포함해서 책임을 추궁한 책으로, '위안부'의 다양한 측면을 지적했을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잘못된 견해로, 예를 들면 이 책에서 저자는 '위안부'의 다양함에 머물지 않고 그 본질 규정에 대해 견해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성노예로 생각하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매춘부로 생각하고 있다. 양자는 서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데 이래서는 화해할 수 없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라는 전체상을 제시하여 '위안부'의 이미지에 의한 화해를 도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죽어가는 일본군을 최후의 민간인으로서 지켜보며 일본군을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한 불쌍한 존재로 간주하고 동정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거기에는 없는 것이다. (......)소녀상은 차별받으면서도 전쟁 수행의 동지였던 기억이나 용서의 기억을 소거한 채, 한만 서린 눈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 상황에 늘어설 것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거기에는 ‘조선인 위안부는 없다’."(154~155쪽)

 

이 책에는 이러한 '위안부' 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 인식의 초보적인 오류가 많이 산견된다. 그뿐인가 선행연구의 무시나 오독, 왜곡, 증언과 사료의 자의적 인용과 연역적 해석에 의해 '위안부'들이 '애국적 존재'이며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왜 절찬받았는가. 그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독특한 용어법에 있다. 예를 들면 책에서 반복해서 "일본국가는 '위안부'를 동원했다"고 쓰지만, 이 '동원;은 얼핏 징집을 명하고 여성들을 데려갔다고 해석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동원이란, 식민지 지배의 결과 조선인 여성들이 가난한 상황에 놓여 자발적으로 '매춘'이라는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것을 동원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는 전후일본의 예찬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일본이 얼마나 식민지 지배를 마주해 왔는가를 반복해서 상찬한다.

 

실제로는 일본군을 면죄하면서 그 책임을 묻고 있는 듯이 꾸미는 독특한 용어법, 전후 일본의 예찬과 긍정에 의한 곡예를 타는 듯한 전후보상 이해에 의해 이 책은 이른바 좌우를 불문한 일본 언론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

 

(정리 김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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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講演】「『帝国の慰安婦』事態と日本の知識人」/鄭栄桓 | 朝鮮新報

国家責任を理解できない「歪んだ法論理」(金昌録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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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慰安婦'被害者の女性たちと民主社会に向けた弁護士会が1月28日午前、ソウル麻浦区延南洞「平和の家」で、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韓日外交長官会談が国際人権基準と国連勧告に合致するのかを問う国連請願書提出のための記者会見を行った。金ミョンジン記者 

 

【土曜版】ニュース分析 'なぜ?' 金昌録(キム・チャンロク)教授より朴裕河教授へ

▶日本軍「慰安婦」強制動員の実態を立体的に眺めるため研究者たちが寄稿を寄せている。歴史学界の研究成果を紹介したキル・ユンヒョン<ハンギョレ>記者の記事に続き、「強制連行論はもちろん、人身売買論も'法的'責任だけを求愛する限り、法を違反しない空間では無力になるしかない」と朴裕河・世宗大学教授(文学)の主張を紹介した。今回は、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日本の法的責任を論じた論考を金昌録・慶北大学法学専門大学院教授が送ってくださった。


日本軍「慰安婦」問題の核心は、朝鮮半島をはじめアジア地域の多くの女性たちを強制的に連れて行き、「性奴隷」を強要した国際法違反の犯罪に対し、日本が責任を負うべきだと主張である。その責任は犯罪に関するものであるため法的責任であり、日本という国家が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国家の責任だ。日本はその責任を果たすため、事実認定、謝罪、賠償、真相究明、慰霊、歴史教育、責任者処罰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が過去25年間重ねて確認されてきた常識だ。


「請求権協定」の本質


1980年代末から日本軍「慰安婦」問題を提起した韓国の市民団体が、1990年代初めから名乗り出て、被害者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ハルモニたちが、街で講演場で法廷で訴えてきたのが、法的責任だ。 1994年の国際法律家委員会報告書、1996年の国連人権委クマラスワミ報告書、1998年の国連人権小委員会マクドゥーガル報告書、2001年の「2000年日本軍性奴隷戦犯女性国際法廷」最終判決文などが改めて確認したのが、まさにその国家の責任である。


1990年代初め、日本政府の最初の反応は「民間の業者」が行ったことなので責任がないということだった。しかし、1992年に証拠資料が公開されると、直ちに政府スポークスマンである加藤官房長官が軍の関与を認め、「謝罪と反省の気持ち」を表明した。以降実施した資料調査と被害者の証言聴取をもとに1993年には河野官房長官が談話を発表した。「河野談話」は、「甘言、強圧などによる、本人らの意思に反して募集」し、「官憲などが直接加担」しており、「強制的な状況の下での過酷な」生活を強要したと明らかにした。特に朝鮮半島については、日本の「支配下にあったため」、つまり構造的な強制性が作動したため、「全体的に見て本人たちの意思に反して」強要したと明記した。これは、日本の法的責任が存在するという事実を明確に認めたものだ。


しかし日本政府は、法的責任は1965年の韓日'請求権協定'によって解決されたと主張した。代わりに'道義的責任'を負うとして「国民基金」を作って被害者たちに「賠償金」ではなく、「慰労金」を支給すると乗り出した。「国民基金」は、「道義的責任は認めるが、法的責任は決して認めることのできない」と、不誠実な態度であったため、多数の韓国人被害者たちによって拒否され、結局は失敗に終わってしまった。


さらに、韓国政府は2005年に韓日会談関連文書を開示し、日本政府とは正反対に「日本軍慰安婦問題など、日本政府・軍など国家権力が関与した反人道的不法行為については請求権協定により解決されたものと見ることができず、日本政府の法的責任が残っている」との立場を明確にした。2011年に憲法裁判所は、日本政府の「法的責任」が存在することを前提とし、韓国政府が日本政府との解釈上の紛争を解決しないことは違憲と宣言した。2012年に最高裁判所は、条約に関する最終解釈権を持った機関として、「日本の国家権力が関与した反人道的不法行為」は、「請求権協定」の適用対象でないともう一度確認した。


どちらの主張が妥当なのだろうか? 日本政府の主張は、初めから無理筋であった。韓日両国政府が認めているように、「請求権協定」は、領土の分離、つまり一つだった地域が二つに分かれたことによる財政的・民事的債権・債務関係を解決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例えば、日帝強占期に朝鮮半島に進出した日本銀行に朝鮮人が入った預金を日帝の敗北でその銀行が日本に帰ってしまった状況で、どのようにするだろうかという日常的な金銭問題を処理するためのもので、反人道的不法行為を対象にしたものでなかった。何よりも日本政府としては1992年になって初めて日本軍「慰安婦」問題を認めたことから、以前には問題自体が存在しなかったことだ。 しかし日本政府の主張は結局、問題が存在してもいなかった1965年に、問題が解決されたということになる。これはそもそも論理的に成立しがたい主張なのだ。

 

すべての道は「業者」に通じる


日本は決して間違いを行った国ではないという信念に結集した日本の右翼には、とても不愉快な状況だった。それで彼らは「河野談話」を形骸化させて法的責任の存在自体を否定することにより、その状況を脱しようとした。そんな彼らが注目したのが、朝鮮半島の場合、「強制連行」の証拠文書が発見さ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彼らには日帝強占期の朝鮮半島には構造的な強制性が作動していたために敢えて強制連行する必要がなく、強制連行をした違法事実を記録した文書は初めから存在し難く、さらに日帝の多くの公文書が焼却・廃棄されており、そもそも問題が'連行'に限られたものではないという事実は重要ではなかった。「強制連行の証拠はない。それで狭義の強制性がなかった。だから強制性がなかった」という度重なる論理飛躍を通じて犯罪がないと言い張れば済むことだった。「政府が発見した資料では、軍や官憲によるいわゆる強制連行を直接示す記述は発見されなかった」と、2007年に安倍内閣の閣議決定はそこから出たのだった。

 

昨年12月28日に朴槿恵政権は、その安倍内閣と「最終的・不可逆的解決」に合意してしまった。日本政府が認定した事実は、せいぜい20年前の'国民基金'水準で、強制性という面では1993年の「河野談話」よりはるかに後退したもの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お墨付きを与えてしまった。そして加害国の日本政府は舞台から降りてきて、「強制連行はなかった」と騒ぎ回っても、被害国である韓国の政府はその挑発に対して正面対応もできないまま、むしろ自国の被害者や市民たちが反対する財団をどうにか設立しようとして、以前にはなかった葛藤をもたらしている惨憺たる光景が我々の目の前に広がっている。法的責任が重要だという事実、安倍政権の日本がそれを形骸化させるため、執拗に祈祷してきたという事実をきちんと得られなかった外交事件の結果だ。


『帝国の慰安婦』は、日本軍「慰安婦」に関するこのような'法的責任'を妨げている。多くの人によって指摘されたように、部分の全体化、例外の一般化、恣意的な解釈と引用、極端な晦渋、根拠のない仮定から出発した過度な主張など、数多くの問題点に満ちた『帝国の慰安婦』はすでに学術書としての基本を備えているのか疑わしい本だ。しかしこの本の最も大きな問題点は、「歪んだ法ドグマ」である。


『帝国の慰安婦』は、「朝鮮人慰安婦は、敵国の女性とは違って、日本軍と同志的関係の中で愛国をしたのだ」と主張する。その根拠は彼らが「帝国の一員」、「国民」、「日本人」だったためだという。 再びその根拠は1910年のいわゆる「併合条約」が「両国の合意」によるものだからだと記述する。その条約が、強迫によって締結されたものであるため、そもそも無効だという韓国政府の公式立場には、我関せずのようだ。


『帝国の慰安婦』は、「請求権協定を通じて日本は補償をして、韓国は権利を消滅させた」と主張する。しかし日本政府自らは補償をしたことがない。1965年には日本軍「慰安婦」問題自体を認めなかった。韓国政府が日本軍「慰安婦」の権利を消滅させたという証拠はどこにもない。むしろ、韓国政府と憲法裁判所と最高裁判所の公式立場は、日本政府に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法的責任が残っているというのにだ。それでも明確な根拠を提示せず、韓国の行政部と司法部が「不正確な情報」に振り回されたと主張する。


従って、『帝国の慰安婦』のすべての道は「業者」に通じている。『帝国の慰安婦』は'業者の責任'を強調するために使われた本としても過言ではないほど、'業者の責任'にこだわっている。しかし、果たして誰が業者に責任がないとするのか。責任の本質は日本の国家責任ということだけだ。『帝国の慰安婦』はその本質を否定しようとしたのが、業者の責任が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ると主張する。「慰安所」を企画し管理した日帝の大きな不法には目をつぶって、末端の実行行為に加担した業者の小さな違法にのみ集中する。さらに、'業者'は'軍属'だとしながら、つまり日帝の国家機関だとしながら、責任は日本という国家ではなく、個人に問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張っている。これは、日本軍「慰安婦」問題の本質が日本の国家責任であることをまったく理解できない、努めて否定しようとする結果以外の何ものでもない。

 

幹を否定し、葉だけがふわふわと浮かぶ


もちろん、『帝国の慰安婦』の著者は文学者に過ぎず、法学者ではない。だから法に対する理解が不十分でことができる。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法律の誤った理解に満ちた過度な主張が免責されることはできない。「1910年の条約は強迫によって締結されたものであるためそもそも無効であり、1965年'請求権協定'にもかかわらず、日本政府に日本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法的責任が残っている」いうのが韓国政府の公式立場なのも、これといった根拠を提示することもなく、日本政府と同様の主張を展開するのは度がはずれている。日本政府自らが補償をしたことがないと言っても、「補償をしたことは間違いない事実」だと言い張り、日本政府より先行する。


著者は、「法的責任のドグマから抜け出さなければ」と訴えながら、自身は果てしなく「歪んだ法ドグマ」に陥っている。帝国主義国家が強要した条約を掲げて、'性奴隷'被害者に、「協力者」、「加害者」、「無意識的な帝国主義者」との地位を強要する。日帝が植民地'法'によって行ったのだから問題に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主張する。植民地支配の国家主義、男性中心主義、近代資本主義、家父長制が問題だという、既に多くの学者たちが提示した、それ自体としては妥当な主張が、法的責任に限ってはひたすら「業者の責任」に矮小化されてしまう。そのような葉を強調するために幹を否定したため、葉だけが空中にふわふわと浮かぶ不思議な風景を作り出している。

 

犯罪を犯したなら認め、謝罪、賠償、真相究明、慰霊し、歴史教育を行い、処罰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が常識だ。日本政府はその常識の土台を壊そうとする。遺憾にも『帝国の慰安婦』は、日本政府よりさらに一歩踏み込んだ位置に立っている。法に対する誤った理解で出発した「歪んだ法ドグマ」に囚われながら。


『帝国の慰安婦』が作り出した不要な騒乱は、そろそろ終わらせた方がよい。

 

金昌録(キム・チャンロク)慶北大学校 法学専門大学院教授

 

[原文] 국가책임 이해 못하는 ‘뒤틀린 법 논리’ : 한겨레(2月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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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国連、戦争プロバガンダ(国際刑事弁護士クリストファー・C・ブラ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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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側のプロバガンダ宣伝は現在極地に至り、服従しない民族とその国の人民に対するデマ宣伝を絶え間なく並べ立てる米国とその同盟勢力の犯罪的な圧力行為によって爆発寸前にまで進んでいる。

 

米国が国連人権理事会の「調査委員会」が作成した「報告書」に基づいて、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を国際裁判所に付託することにした犯罪的な内容の決議案を主導したのは、これらのプロバガンダ・マシンを利用した結果であり、それはまた、世界を主導・支配するための自らの目的達成のための手段に、国連という機構を利用した実例でもある。

 

調査委員会の報告書そのものはきわめて驚くべきものである。内容が不自然なことだけでなく、調査委員会の委員たち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で起きていると主張した犯罪的内容が、実際においては米国内にも存在するものだからだ。

その偽善は、人々を気絶させるほどであった。報告書の段落31では、委員会が行った公開聴聞会が米国、英国、日本、韓国の支援によって行われたとしたが、彼らみんなが朝鮮の敵対勢力であって、報告書で述べたすべての統計資料、集会場、翻訳員、技術、安全、印刷物、重要な証人を彼らが提供したという事実に誰もが驚かざるを得ないだろう。

また、委員会の3人のメンバーであるオーストラリア人のマイケル・ドナルド・カービー、セルビア人のソーニャ・ビセルコ、そしてインドネシア人のマルズキ・ダルスマンら全て、米中央情報局(CIA)の活動団体に加担した経歴があるという事実にも驚かざるを得な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関連する特別報告者であるダルスマンが発表した最初の報告書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関する委員会を設けるための基本文書として活用された。

彼は、米国の”友人”としてよく知られている日和見主義者で、インドネシアのゴルカル党のメンバーであった。この党はCIAの支援の下、1965年に50万人の共産主義者と左翼系および労働界関連運動家らを殺害したことで有名である。

彼は現在も、米政府の活動グループである米国インドネシア協会の顧問になっている。米国インドネシア協会の会長はデービッド・メリルという者で、彼は1980年代と1990年代にアジアおよび東欧諸国で米国CIAフロント組織として知られていた国際開発庁の高官であったし、バングラデシュ駐在米大使を務めた経歴も持っている。

 

ダルスマンは国際指導部財団のメンバーである。この財団の後援者はジョージ・W・ブッシュ、レフ・ワレサのような不穏な人物である。この財団は、以前の西側指導者の連合で、世界の国家元首に国家運営に関する助言を与えるという。

しかし、その助言を民主的な手順から脱して人々が分からないように秘密裏に行われている。彼らが掲げているスローガンは「指導者に対する統治支援」である。もちろん、当該国の住民は自分たちの代表を推して彼らが自国の指導者たちの国家統治に助けを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ているが、現実は明白にそのようになっていない。英軍の元将軍で、英王室海兵隊の元総司令官であるロバート・フルトンが財団の責任取締役、責任者になっている。

財団はスイスの法人組織となっているが、本部はロンドンにある。この組織の財政がシェブロン、バークレイズ銀行、ゴールドマン・サックス、アルカテル、BAEシステムズ、エクソンモービル、フォード財団など、各種の団体によって保障されるという事実は別に驚くことでもない。

 

調査委員会の二人目の委員はソーニャ・ビセルコで、彼女はセルビアで最も憎まれている人物であり、NATOの側に立っている希世の反逆者と見なされている。彼女は、1990年代にミロシェビッチ大統領に反対して米国、NATOと露骨に共謀し、1999年にNATOが自分の祖国であるセルビアに反対して行った爆撃行為を支持し、ミロシェビッチをハーグのNATO裁判所に付託することを主張した。

ソーニャ・ビセルコは、米国際開発処の後援を受けるヘルシンキ人権グループの創始者および理事長である。ヘルシンキ人権グループは、CIAの活動団体であるヒューマン・ライツ・ウオッチと連関のある機構である。ソーニャ・ビセルコはまた、米政府の公式団体である米平和研究所の高位人物である。この研究所の理事会メンバーは、議会の承認の下で米大統領が任命する。理事会のメンバーの中には現在、チャック・ヘーゲルとジョン・ケリーも属している。

 

マイケル・D・カービーは、ドイツのソビエト管轄区域でのいわゆる人権蹂躙(じゅうりん)行為調査のために西ベルリンに組織された機構である国際法律家委員会の元委員長であった。国際法律家委員会は自由法律家のためのアメリカ財団とフォード財団を通じてCIAから資金を与えられ、同機構の創始者の中には元CIA長官であるアレン・ダレスも属していた。

国際法律家委員会は、全世界の左翼系法律家の機構である国際民主法律家協会に対峙して組織された機構であった。この記事の筆者であるわたしもやはり、国際民主法律家協会の一員である。カービーは、1990年代にオーストラリアを共和国につくろうとする努力を妨げた人物として、オーストラリアでの英国の君主政治を維持することを主張した立憲君主制のためのオーストラリア人の会の創設メンバーでもある。

 

この3人の人物はみな潘基文が任命した人々で、潘基文と言えば、反腐敗政策に反対した国連内の監視部署である内部監視室の独自性を非難したことにより、また2010年の「天安」号危機の際、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反対する国連安全保障理事会の行動を求めた偏向的な行為によって、国連内に不安を醸成した人物である。

国連事務総長は、国連安全保障理事会の見解を反映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潘基文は米国、英国、フランスの機嫌を取りながらロシアと中国を無視する傾向を見せたが、これは彼が米国の操り人形である韓国で高位外交官の職務を長い間務めていて、ブッシュ大統領の支持下で国連事務総長候補になったという事実を見れば、別に驚くべきことではない。

 

調査委員会が作成した文書の不合理さは、始めの部分からも明白に分かる。報告書の段落2には、次のように指摘されている。

「調査すべき違反の内容には、飲食の権利、収容所、拷問および非人間的な虐待、独断的な監禁、差別、表現の自由、生存権、移動の自由、他国への拉致の形態で強行される強制的な失踪などが属する。」

これを読んでみると、調査委員会がアメリカ合衆国内に存在する状況に対する調査を行っている気がする。

なぜならば、米国で人口の5分の1が飢餓を避けて食料購買券に依存しており、収監者は個人企業によって強制労働力に利用されているからであり、一般の収監者と戦争捕虜に対する拷問と非人間的な虐待が日常茶飯事になっているからだ。米国では、人身保護令状が中止され、全世界的範囲で遠まわしに表現するならば、「犯人引き渡し」計画によって強制的な失踪を伴う独断的な監禁行為が一般的な現象となっており、また米国の政治に同意しない人々にとっては表現の自由が甚しく制限されており、移動の自由は政府が承認した国にのみ制限されており、また多くの少数民族、特に黒人、中南米人、貧しい人々に対する警察の殺人行為が日を追って増える中、このような人々の生命権は保障されていないからだ。

 

しかし、調査委員会の委員たちは米国政府によって米国人を対象にして強行される人権犯罪行為についてはあまり関心を寄せていない。むしろ、彼らは政治的動機から発した米国の代理人として見せしめ式聴聞会を催し、政治目的の報告書を作成している。

報告書の段落12で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が調査委員会の報告書で示したすべての主張を反ばくして2014年9月13日に自国の人権状況に関する167ページの朝鮮人権研究協会の報告書を作成したと指摘した。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が国連の報告書を反ばくして、証人らの証言が偽りであると主張したのは驚くべきことではない。この主張は、この記事の筆者だけでなく、NATOの支配下にある旧ユーゴスラビアで、そしてルワンダ裁判所で弁護士らが経ている体験に鑑みると、深刻であると言わざるを得ない。これらの所では、米国に操られる検事による証人の証言偽造が優先的なつくり上げ方法に利用されている。

 

調査報告書ではまた、「報復を恐れて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を訪れたことのある多くの外国人訪問者が自分たちの体験と情報について調査委員会と意見を交わ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指摘した。この文句は、国際民主法律家協会に属している全米法律家組合を代表する弁護士代表団の一員として2003年に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を訪れたことのある筆者にとって、実に驚くべきことだと言わざるを得ない。当時、代表団の訪問記が全米法律家組合のウェブサイトに掲載された。

 

訪問記は、朝鮮社会のすべての面について取り扱ったが、調査委員会は一度もそれを読もうとしなかったし、われわれの見解を聞くためにわれわれと接触しようとする試みもなかった。調査委員会の委員たちは、われわれが平壌に到着した日、ホテルでわれわれが会った5人の米軍将校にも会わなかった。その米軍将校らは、米軍遺骨調査チームのメンバーで、彼らの使命は朝鮮戦争当時に死亡した米軍兵士らの遺骨を確定することであったし、彼らは朝鮮のすべての地域を自由に行き来することができた。

 

その時、われわれはいわゆる"孤立した国"と知られているこの国で、われわれが初めて会った人々が米軍将校たちという事実にとても驚いた。われわれは朝鮮という国に到着したばかりであったし、また何事が待っているのかも全く分からなかったので、彼らにこの国について、そしてこの国の状況についてどう考えているのかを聞いた。驚くべきことに、ある米軍少佐は次のように述べた。

 

「わたしの言葉を引用せず、またわたしの名前を明かさないでくれ。ハワイを発ってここへ来る時、われわれは北朝鮮は地球上の地獄だと言われた。しかし、ここにわれわれは2年目滞在しているが、われわれが聞いたことの中で合う言葉は一つもない。ここは良い所であり、人々もわれわれを親切にもてなしてくれる。われわれが西側のメディアから聞いたすべて、われわれの上司がわれわれに言ったすべての言葉が完全に、そしてすべてうそだ」

 

このような内容は、この国を発ちながらわれわれが会った二人のコンゴ共和国外交官との対話でも引き続き聞かれた。われわれは彼らにどのような体験をしたのかと尋ねた。彼らは自分たちが朝鮮について以前に聞いていたすべてが完全なデマ宣伝で、詐欺であったということから大きな衝撃を受けたと言った。彼らは、朝鮮の人々のように暮らすのが大部分のアフリカ人が願っている夢だと述べた。

 

これらすべての結論として言えるのは、調査委員会の報告書は米国の宣伝行事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は、次の事実からより明白に分かる。国際刑事裁判所の規約によって、安全保障理事会がローマ条約の加盟国である国々に対してのみ付託することができるにもかかわらず、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が条約の加盟国でない事実を知りながら、調査委員会はこの問題を国際刑事裁判所に付託することを安全保障理事会に訴えた。そして、調査委員会は米国とその同盟勢力の宣伝道具として悪名をとどろかしている特別裁判所に問題を付託することも求めている。調査報告書の唯一の目的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政府を犯罪的なものに描写し、西側の人々にDPRKとの戦争を準備させようとするところにある。

これは、米国が旧ユーゴスラビア、イラク、アフガニスタン、リビア、シリア、そして最近、マレーシア旅客機に対する攻撃に関連してオーストラリアでのG20会議でオバマがロシアに反対して取った宣伝戦略と同じである。

 

苦い教訓は、いったん犯罪のレッテルが張られれば、戦争の手先らがすぐ発動されるということである。歓迎に値する兆候は、否定的な宣伝キャンペーンにもかかわらず、ロシアや中国をはじめ数多くの国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に反対する決議案を排撃したことである。

これらすべての事実から、われわれはつねに警戒状態を維持すべきだということが分かる。それは、このようなキャンペーンの基本目標が、NATO同盟国をして、彼らが次に計画された戦争を支持するようにし、最小限にそれを阻まないようにしようとするところに目的があるからだ。

 

※クリストファー・ブラックは、トロントに拠点を置く国際刑事弁護士で、彼はカナダ弁護士会のメンバーであり、オンラインマガジン「ニューイーストアウトルック」で、人権や戦争犯罪関与のケースで注目を集めている。

 

[原文] North Korea, The UN, And War Propaganda

North Korea, The UN, And War Propaganda | New Eastern Outlook

30ヵ国回答者の10ヵ国指導者に対する肯定度(ハーバード大学ケネディ・スクールASHセンターによる調査)

日本人の対中認識・感情の国際的ズレ(21世紀の日本と国際社会 浅井基文のページ)より、ハーバード大学ケネディ・スクールASHセンターにより2014年に調査された、世界主要10ヵ国の指導者、すなわち安保理常任理事国でもある5大国(アメリカのオバマ、中国の習近平、ロシアのプーチン、イギリスのキャメロン、フランスのオランド)、及び独日(メルケル及び安倍晋三)、中露とともにBRICSを構成する3ヵ国(ブラジルのルセフ、インドのモディ、南アフリカのズマ)の指導者の内政、外交及び経済政策に対する評価を世界30ヵ国で世論調査した結果集計を紹介します。

 

1) 10ヵ国指導者の内政に関する評価

 ①内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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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経済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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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肯定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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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オバマ習近平プーチンに対する各国の肯定度評価割合

①内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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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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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肯定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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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ヵ国回答者の10ヵ国指導者に対する肯定度

①内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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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外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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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浅井貴文氏による解説(※浅井氏記事より転載)

 以上から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いくつかのポイントを指摘しておきます。

◯日本人の習近平に対する評価は、内政、外交及び経済政策のいずれに関しても、他の国々の人々の評価と比較して格段に低い。
◯例えば、アメリカ人は、習近平の内政について2人に1人以上が評価している(52.6%)のに対して、日本人は5人に1人未満の人(13.6%)しか評価していない。外交についてもほぼ同様で、アメリカ人の51.3%が評価しているのに、日本人は14.3%の人しか評価していない。経済政策に至っては、アメリカ人の4人に1人以上が評価している(28.6%)のに対して、日本人はわずか1.8%であり、50人に1人弱の人しか評価していない。
◯中国とライバルと見なされているインド人についても、習近平の内政に対する評価度は77.5%、外交に対しては74.7%、経済政策はやや低いとしても48.1%(2人に1人弱)であり、日本人と比べてはるかに高いし、アメリカ人より高い。
◯中国と領土紛争を抱えるヴェトナム人に関しても、習近平の内政に対する評価度は56.5%、外交に関しては47.4%、経済政策に関しては15.9%となっており、日本と比べればはるかに高い。
◯また、30ヵ国の回答者による10ヵ国指導者の内外政に対する評価に関しては、ドイツのメルケルがトップであるのに続いて、習近平メルケルにほぼ匹敵する高い評価を受けて第2位である。これに対して安倍首相は、内政及び外政ともに10ヵ国指導者のなかで最下位であり、しかも、他の9人の指導者は50%以上であるのに対して、安倍首相のみが40%台スレスレという低さである。
◯ただし、最悪の日中関係を反映して、中国人の安倍首相に対する評価も低く、内政14.1%、外交13.1%、経済政策9.4%となっている。


 以上から確実に言えることは、日本人の対中認識・感情は国際的スタンダードからかけ離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内閣府が行った2014年の世論調査では、中国に対して親しみを感じる人は14.8%(親しみを感じない人が83.1%)であり、1978年以来の最低を記録しています。実に5人に4人以上の人が中国に対して親しみを感じ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天安門事件が起きた1989年までは、中国に親しみを感じる人が70%台で推移していました。この数字は、2000年代までの対米感情とほぼ匹敵するものでした。それが、1989年の天安門事件、2003年から行われた小泉首相靖国参拝による日中関係の悪化、さらに2010年に起きた尖閣問題という3つの事件を契機として、日本人の対中感情は大きく落ち込み、1980年の78.6%というピーク時と比較すると、2014年はなんと64%近く下がっています。
 以上に紹介した習近平に対する日本人の評価の低さは、このような対中感情をモロに反映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好き嫌いが内外政における中国のパフォーマンスに対する評価度を国際スタンダードからかけ離れさせてい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日本人として深く反省する必要があるというのが私の結論です。「坊主憎けりゃ袈裟まで憎い」というのでは、国際関係を主体的かつ責任感を持って担う資格があるとは言えないと思います。

 

[出典] 日本人の対中認識・感情の国際的ズレ(21世紀の日本と国際社会 浅井基文のページ

 

 

 

「忘れられないように助けてくれ」

h21.hani.co.kr

ハンギョレ21 ソン・ホジン記者  2016.2.2 

映画「鬼郷」14年目にして市民の力で2月24日に全国で封切り…チョ・ジョンネ監督、「映画の上映の度に少女が帰って来るという気持ち」

 

 連れて行かれた人々を元の場に戻してあげないと故郷を訪れることができない、遠くへ行ってしまった10代の少女たちがいる。日本軍の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彼女たちのうち、相当数が異国で死んだり捨てられたりして、ごく少数が戻って来て、傷を負ったまま生きてきた。チョ・ジョンネ監督の「鬼郷」は、1943年に15歳前後で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少女たちの過去に光を当て、1991年を生きる若い母子が、異国で亡くなった慰安婦被害者の少女たちの霊魂を故郷に連れて帰るという内容の映画だ。15歳観覧可。

 この映画が構想されてから14年目にして公開が迫っている。7万5270人の市民が11億6122万ウォンの制作費を後援して「鬼郷」を立ち上げた。市民後援者の数は、世界映画史上最大の規模だ。「ハンギョレ21」も、18ヵ月間この映画に関する話題を報道し、制作費の調達のためのオンラインファンディングに取り組み、「鬼郷」の公開に協力した。ここに「鬼郷」を制作した人たちを紹介する。歴史的・文化的証拠として残そうとこの映画に参加した人たちだ。 f:id:eastasianpeace:20160211103513j:plain

映画「鬼郷」のポスターの前に立つチョ・ジョンネ監督。インタビューを終えた翌日の1月21日、彼は「鬼郷」を引っ提げて米国の現地紙社会のために出国し、2月1日に帰国した。

 

 去る1月19日、映画「鬼郷」チームのささやかなパーティーが開かれた。ケーキの上に「2.2.4」と書かれた3つの数字が飾られていた。チョ・ジョンネ監督(43)がロウソクを消し、俳優とスタッフが心を一つにして拍手をした。その日は、全国公開の日付(2月24日)が書かれたポスターがマスコミで紹介された日だった。2月24日という日付を受け取るまで、14年がかかった。監督は、「感動的で感激していながらも、劇場公開という海へ乗り出すために、新たに始めるという気分」だと語った。

2002年、鼓手を揺さぶった一枚の絵

 14年の出発点は、一枚の絵だった。大学時代(中央大演劇映画科)に国楽同好会でも活動していたチョ監督は、創作パンソリ唄者「パダソリ」の専属鼓手(太鼓をたたく伴奏者)だった。パダソリの一員として慰安婦被害ハルモニが住んでいる「ナヌムの家」を訪れ、公演と奉仕活動をした。そして、姜日出ハルモニが美術心理治療の過程で描いた「燃やされる乙女たち」という絵を2002年に見た。慰安婦として連れて行かれた少女たちが山中に掘られた穴で燃やされる様子を目撃した記憶、そこで死ぬ直前に突然戦闘が始まり、辛うじて脱出して、恐怖で真っ青になった表情で隠れている自分の姿を描いた絵だった。

 「絵を見て衝撃を受けました。慰安婦被害者の方たちがどこかで生きていると漠然と考えていたのが、たくさんの人々があのように虐殺されたということを知ったのです。消耗品のように、物品のように扱われ、簡単に殺されてしまったことに驚愕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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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督は、姜日出ハルモニが描いた「燃やされる乙女たち」を2002年に見て、「鬼郷」を構想した。

 

 彼は変な夢を見た。

 「衝撃を受けたためか、体調もすごく悪くなりました。そして、明け方に夢を見たのです。穴で燃やされて死んだ少女たちが、ある時に起き上がるのですが、血まみれになった服が白い服に変わり、傷跡もなくなっているのです。足をさっと上げて女たちが空に舞い上がるのですが、何と言うか壮観でした。亡くなった人たちが、今、すごく故郷に帰りたがっているのだな、そんな思いを強く感じました。その時から、これを映画に具現化したい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

 その決心が、監督としての彼の人生をどれほど長く辛いものにするのか、予想すらできなかった。夢を見た後、彼は、異国で死んだ若い少女たちが蝶になっても故郷に戻って来る「鬼郷」の大枠を書き下した。

 霊魂の帰郷を願いながらタイトルを鬼神の「鬼」、故郷の「郷」と決めた。以後、内容を具体的に整理した後、2008年から投資者を募り始めた。彼は、知人であれ知らない人であれ、映画について話をする機会があれば「鬼郷」の内容を紹介し、この映画を必ず作りたいのだと語った。

 チョ監督を知る映画関係者は、彼を惜しむ気持ちから思いとどまるよう説得した。「慰安婦の紹介は、韓国映画界で最後に残った金脈のような素材だが、興行性が著しく低く、多くの監督が映画化できなかったもの」だと助言した。「この映画を作って(失敗した後に)監督生活を終わりにしたいのか」という心配もした。

 投資者たちの反応はもっと冷たかった。彼が出したシナリオを見もしないことも多かった。「監督がマイナーにしかいないので分からないようだが、アイドル歌手でも俳優に使うとか。素材もマイナーだし。この映画は100%ダメだ」と断定する人もいた。

「監督生活を終わりにしたいのか」と引き止める

 「戦争になれば、どっちみち女性はやられるものではないか」というひどい言葉も聞いた。「若者がこんなことをするな。慰安婦ハルモニたちは偽物だということを知らないのか。身体を売りに行った女たちだ」と話す人もいた。この人は、首都圏の市長の予備候補として出馬した経歴もあった。チョ監督は、怒りを堪えていたが、「ハルモニに謝ってください」という言葉を投げかけて、その場を立った。

 転機は2013年に訪れた。投資の意向があるという中国の人物と連絡が取れ、チョ監督は、中国人の配役を加えてシナリオを一部修正した。中国の女性も慰安婦として動員されたため、その人が「鬼郷」に関心を示したのだ。投資の可能性が熟し、契約のために中国の北京まで行った。しかし、先方が「主人公を中国人にしなければ投資しない」という条件をいきなり出してきた。受け入れられない提案だった。

 中国側の大きな投資が水泡と化し、この映画を共に準備した人々も多くが離れていった。その時、監督は、「これはダメな映画なのか」と自問した。「慰安婦被害ハルモニをお招きできなくて申し訳なかった。すべての出口が閉ざされたようで自信を失い、鬱の症状も出た」と回想する。当時の彼を見たある関係者は、「監督の目から光が消えたように意欲が感じられなかった」と語った。

 しかし、よくよく見てみると、最後まで自分を信じてくれる妻がいつも同じ場にいた。2009年に初めて会い、無鉄砲にも日本軍の配役を引き受けてほしいという提案を受け入れてくれた後、「鬼郷」チームに合流してくれた実の弟のようなパートナー(イム・ソンチョルさん)も離れずにいた。そうして、彼は元気を出さなければと思った。

心が乱れると「ナヌの家」を訪れる

「ナヌの家」の銅像の前で、「私の生涯が終わってハルモニたちに再びお会いする時、笑顔で走って行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私を起き上がらせてください」と祈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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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慰安婦関連行事(上)に積極的に参加してきた彼は、2014年 10月、慶尚南道の居昌で「鬼郷」の宣伝映像を撮影した。

 

 以後、彼は、「もっと身体を低くして『助けてくれ』と話をして回った」と語った。「『助けてくれ』という言葉は、後に『鬼郷』のスタッフとして合流した人々も、共通して監督から聞いた話だと口を揃える。

 「『助けてくれ』と言ったのは、その言葉が、慰安婦被害ハルモニたちが私に言った言葉だったからです。映画を作れと命令したのではなく、『私たちがされたことが忘れられないように助けてくれ』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

 彼は、心が乱れると、慰安婦被害ハルモニが住んでいる「ナヌムの家」を訪れた。そこには、生前に彼が会ったが今は世を去った「ナヌムの家」入口に銅像が建てられたハルモニたちもいる。銅像の前で「私の生涯が終わってハルモニたちに再びお会いする時、笑顔で走って行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私を起き上がらせてください」と祈った。

 年老いたハルモニたちに代わってこの映画が国内外を巡る「文化的証拠」となることを願っていた監督は、これ以上制作を遅らせ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生涯を終える慰安婦被害ハルモニが増えていた。

 投資者に無視された彼を起き上がらせたのは市民だった。彼は、「鬼郷」のあらすじと映画の関連映像をインターネットにアップし、これを見た市民たちが少しずつ後援金を送り始めた。その後援金を元手にして、2014年10月に慶尚南道居昌のソドトゥで「鬼郷」を紹介する短い映像を撮り、インターネットに公開した。この映像がまた市民の関心を呼ぶきっかけになった。

 「ハンギョレ21」も、この映画の製作費の調達に賛同した。インタ―ネットのポータルサイトであるダウムカカオと協力して、「ニュースファンディング」(現ストーリーファンディング)を始めた。2014年12月 18日から44日間行われたこのファンディングで2億ウォン余りが集まり、「鬼郷」制作陣の後援口座にも市民の後援金が押し寄せた。貯金箱に集めたお金を母親と一緒に募金した幼稚園児、一日に千ウォンずつ365日間で36万5千ウォンを集めて募金した家族もいた。

 監督は、このような後援金と、日本軍役を兼任したイム・ソンチョルPDが集めてきた市民投資金を合わせて、2015年6月に撮影を終えた。「手伝いに来てくれたタッフが、この映画の主人に変わっていった」とチョ監督は感謝した。俳優のソン・スクさんらも「出演料はいらない」と撮影に参加した。

 しかし、コンピュータグラフィック、色補正、サウンド補強などの後半作業のための制作費不足に再び直面した。「ハンギョレ21」は、第2次ニュースファンディングを始め、市民たちは約3億ウォンを集めた。

「日本国民も見るべき映画」

「この映画を家だとすれば、市民が煉瓦を一つ一つ集めてく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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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年4-6月、「鬼郷」の本撮影を進め(上)、その年8月15日に「ナヌムの家」で「鬼郷」のハイライト映像を上映した(中)。去る1月17日のソウル劇場での試写会を最後に、後援者第1次全国試写会を終えた。

 

 海外の関心も相次いだ。「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は、所属記者を直接韓国に派遣した。慰安婦をテーマにした映画が国民の後援方式で制作される過程を、昨年3月に1面を割いて報道した。公開もされていない韓国映画をこのように大きく報道することは異例のことだ。

 米国連邦議会で日本の謝罪を求める慰安婦決議案を主導したマイク・ホンダ議員が、昨年7月末の決議案通過8周年行事に、「鬼郷」のハイライト映像を議員会館で上映するよう手伝った。映像を見たホンダ議員は、「たいへんなパワーを持った映画だ。日本国民も見るべき重要な映画だ」と語った。

 監督は、昨年12月から今年1月中旬まで、国内の後援者のために第1次全国試写会を行った。市民の後援で映画を完成させ、その後援金で全国の劇場を借り切って試写会を開いたことは、映画界で初めてのことだ。1月29日現在、この映画を後援した市民は7万5270人だ。後援金の金額は11億6122万ウォンに達する。市民後援者の規模は、世界の映画史上で最大の記録だ。

 後援者の名前が記されたエンディングクレジットの長い行列を見て、「涙がグッときた」と言う観客が多かった。この映画の配給社は、ポスターに「国民が作った映画」という文言を記した。

 先に映画を見た人たちの評価も好意的だ。試写会でこの映画を見たある観客は、「果たして完成するのか疑問を感じながら後援したが、本当に完成して驚いたし、思ったより完成度が高くてまた驚いた」という文をネットに残した。別の観客は、「普通の映画は劇場から出るとその感動や興奮が離れていくものだが、『鬼郷』は、時間が経つほど悲しみが染み込んでくる」という評価を残した。

 途中で座り込んでいたら、ここまで来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だろう。14年間、妻も「やっとのことで維持する生活」を耐えてくれた。監督の父は、撮影期間中に俳優たちを乗せて移動する「運送スタッフ」として参加した。監督の母は、映画の編集が完了する頃に癌の手術を受けた。今は癌との辛い闘いを克服している。

 「大型制作社でもなく、有名な監督でもありません。いくら私がこの映画を善意で作ったと言っても、あれほど多くの方々が助けてくれるとは予想できませんでした。この映画を家だとすれば、市民が煉瓦を一つ一つ集めてくれたのです。」

 監督は、「映画が1回上映される度に、他郷で亡くなった一人の霊魂が戻って来るという気持ちで映画を作った」と言う。「そして、この映画が上映される度に、儀式を執り行う気分」だと語った。

 映画は、最近、韓日両国の慰安婦問題合意がなされた直後に封切りされることになった。彼は、「(慰安婦)被害者が共感できないのに合意をここらへんで理解しろと言うのは暴力」だと言う。彼を惜しむ映画人は、慰安婦問題の合意に対する政府の態度のために、劇場がスクリーンをたくさん提供しないのではないかと憂慮する。

観客の熱望ほどスクリーンを提供してくれることを

 チョ・ジョンネ監督の願いがある。試写会でこの映画を見た観客の反応ほど、そしてこの映画の封切りを待っていた観客の熱望ほど、劇場のスクリーンが相応に提供されることを、彼は願っている。

 

数字で見る「鬼郷」

14 映画が初めて構想されてから劇場封切りまでかかった年数

75,270 制作費を後援した市民の数。世界の映画史で最大の後援規模

1,161,225,837 市民が集めた後援金の総額(1月 29日現在)

500,000 12歳の子どもが「『鬼郷』を(歴史的)証拠として残す」と、お年玉とお小遣いを集めた通帳を解約して投資した金額

2015.3.15 世界的言論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が、「鬼郷」が国民の後援で制作されていると1面を割いて報道した日

2015.7.28 米国連邦議会の議員会館で「鬼郷」のハイライト試写会が開かれた日

18 2015年12月から2016年1月まで第1次全国後援者試写会を行った回数

1+1 慰安婦被害者を演じた俳優が撮影部のスタッフとして働くなど、俳優が1人2役をすることも

4 主人公の「チョンミン」(慰安婦被害者)を演じた16歳のカン・ハナは在日同胞4世

46 2016年1月29日現在、生存している被害者ハルモニの数。映画が本格的に撮影された2015年だけでも9人の被害者ハルモニが亡くなった

【소개】 박유하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한겨레』 2016년 2월 6일자)

 박유하가 역사수정주의자로서의 마각을 드러냈다. 2016년 2월 6일자 『한겨레』에 게재된 박유하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가 그것이다. 박유하는 이 ‘반론’에서 ‘억울한 일본군론’(나가이 가즈)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 이해를 개진했다. 『한겨레』 일본어판에는 번역되지 않았는데, 박유하의 인식을 드러내는 귀중한 소재이므로, 전문 번역하여 소개한다(『한겨레』 일본어판에 번역이 실리는 대로 삭제하고 편집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개진한 것과 동일한 (1)업자 주범론(=‘전지 공창시설론’), (2)군의 ‘좋은 관여’론, (3)자발적 매춘부론, (4)미성년 징집 예외론에 기초한 일본군의 책임부정론이다. 이 책임 부정론들을 본인은 다양성을 밝혔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자가 매춘 전력이 없는 미성년 징집을 강조하는 것은 매춘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논점 바꾸기와 ‘법’ 운운하는 궤변으로 기만하고 있는 것이 박유하의 「반론」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업자=군속’론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근저에서 뒤집는 주장(사실이라면 군이 직접 관연한 증거이다)이 강조되어 있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한일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한국정부가 포기했다는 주장에 대한 나의 비판에 ‘반론’하기 위하여 박유하가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박유하의 「반론」을 검증한다: 재론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4)」 참조). 이 주장을 채용하는 것이 종래의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는 것을 박유하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학계’ 운운하는 박유하의 연구사 이해는 기본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조심해서 읽기 바란다.

  

 여유가 있으면 논평하겠지만, 문제점을 간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터이다. 결국 ‘위안소’ 제도가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다만, 나가이의 주장이 ‘강제연행’ 부정론의 ‘논거’로 다루어진 것은 너무가 애처롭다. 아마도 본인이 읽으면 까무러치지 않을까. 박유하의 작업은 하나에서 열까지 이런 식이라서 피인용자들에겐 이런 피해도 없다. 아울러 사료인용처럼 보이는 “ ” 안의 어구는 모두 부정확하므로 "그대로"라고 표시해 두었다. 읽기 쉽도록 적당히 행을 바꾸었다.

 

(정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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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강제연행, 박유하 교수의 반론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한겨레』 2016년 2월 6일자)

 

 

지난 1월23일 <한겨레>에 ‘위안부, 일본 육군이 주체가 된 전형적 인신매매였다’(길윤형 기자)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분명 조선인 위안부 동원은 이른바 ‘군인이 끌어간 물리적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의 틀 안의 일이었다. 사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군인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식의 논의는 하지 않는다. 일본의 강제성과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논의는 고작 이송 시에 일본 군부의 배를 이용했으니 일본 국가 책임이라거나, 속아서 데려왔는데 알고도 묵인했으니 범죄라는 정도의 논의다. 

그런 사실들이 이제껏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관계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사회를 향해 명확히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강간이 존재했지만 위안소에서의 성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대가가 치러진 관계였다는 것도 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혼란과 불신”은 길윤형 기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쉽고 중립적인 언어의 실패” 때문이 아니다. 2014년 8월에 <아사히신문>이 과거의 ‘강제연행’ 기사 내용을 공식적으로 취소, 수정한 이후 비슷한 발언을 한 한국인 학자나 언론 혹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혼란의 원인

 

그러면서도 이 기사는 “위안부 충원의 주체는 일본 육군”임을 “흔들림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건 새삼스럽게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일본이 인정한 일이다. 물론 나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의 지휘하에 사기·협잡으로 강제연행”된 것이 아니다. 업자에게 여러 편의를 주었지만 일본 군부는 “사기와 협잡”은 공식적으로는 금지했다. “부녀매매조약이 조선에서 적용 제외”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기성 모집을 금지하라는 “내무성 경보국장의 통첩”이 조선반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모든 사기를 허용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만 범죄가 허용되었을 거라는 상상을 근거로 나의 책을 “결국 허망”하다고 하는 이 기사의 주장은, 나의 책을 왜곡하고 전국민을 오도한다.

 

나가사키 경찰서 문서에는 “전차금”을 군부가 지급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문서에는 “소개수수료를 군부가 지급”(그 대로)한다고 쓰여 있는데 이 부분을 두고 길 기자는 “일본 군부가 주체가 돼 전차금을 미끼로 여성들을 2년간의 성매매에 종사시키는 전형적인 ‘인신매매’를 시행”했다고 쓴다. 하지만 문서에는 어디까지나 그런 “말”(그대로)을 “매춘업자가 퍼뜨리고 다닌다”(그대로)고 쓰여 있을 뿐이다. 매춘업자가 여성들을 모집한다는 사실이 “일본의 경찰한테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군이 “인신매매를 주도”해서가 아니다. 경찰은 그저 군이 여성들을 업자를 통해 모집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을 뿐이다. 내무성이 “경찰의 반대 의견이 잇따르자 당황”해서 조선에서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증명하는 문구 역시 어디에도 없다. 부녀매매조약에 관한 국제조약이 조선이나 대만에 “유보”되었다는 김부자 교수의 지적은 참고해야 하지만, 그것이 곧 “매춘업에 종사한 적이 없으며 성병이 없는 여성을 식민지인 조선이나 대만에서 대량으로 모집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도항에 관한 “통첩”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조선인의 중국 이동은 배가 아니라 기차로 이동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또 위안부를 데려간 이가 “칼 차고 모자 쓴” “일본 군인”으로 보인다 해서 그가 꼭 일본 군인인 것은 아니다. 길 기자가 인용한 안병직 교수도 말하는 것처럼 일본군은 업자를 군속 대우하기도 했고 그들에게는 군복이 지급되었다. 따라서 “결국 조선에서의 위안부 동원은 일본과 달리 성매매의 경험이 없는 미성년자가 많았고 그 수법도 당시의 일본의 형법 기준으로도 범죄라 할 수 있는 취업사기가 대부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가거나 소녀가 속한 공동체가 알고도 내친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업자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관리”는 관리감독의 의미가 강했고, 업자가 위안부를 착취하지 않도록 했다.

 

 

법’의 한계

 

길윤형 기자의 기사가 결론으로서 인용한 나가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군으로부터 위안부 경영을 위탁받은 민간업자나 모집업자가 사기·위계에 의해 여성을 위안소에 데려와 일을 시켰다.”(그대로) 그리고 “위안소의 관리자인 군은 이를 처벌하지 않고, 사정을 알고도 이를 방치했다면 일본군이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없다. 그런 범죄에 피해자인 여성이 자신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느껴도 놀랄 일이 아니다.”(<세카이> 2015년 9월호)

 

이 부분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사기/위계의 주체는 ‘업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저 군이 알고도 처벌하지 않았으면 강제연행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군부는 당시 오히려 업자가 사기로 데려오지 않도록 계약서를 쓰도록 했고 확인했다.(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 <‘종군위안부’ 관계자료 집성> 2) 물론 계약서를 썼으니 문제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약’이라는 이름의 ‘법’의 존재는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 마찬가지로 오로지 국가배상을 입증하고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강제성을 주장하려는 발상은, 법의 바깥에서 이뤄진 일에 대해서는 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법’이란 국가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고 국가시스템은 근대 이후 언제나 남성중심주의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강제성 여부나 국가배상 여부가 아니라 군대를 위한 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군부의 발상이 어떤 식으로 여성들을 참혹하게 만들었는지다. 강제연행론은 물론 인신매매론도 ‘법적’ 책임에만 구애하는 한, 법을 어기지 않은 공간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성노예’의 주인은 누구인가

 

식민지 경찰은 당시 횡행하던 사기나 유괴를 기본적으로는 단속했다.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진 국민에 대한 법적 보호는 똑같지 않다 해도 식민지에서도 이루어졌다. 식민지 여성들만 사기나 납치에 노출되도록 ‘식민지 경찰’이 부도덕했다는 것은 90만 가까이 살았던 ‘식민지 일본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발언이다. 식민지 경찰은 “포주들의 눈물도 인정도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당시의 경찰도 분히 여기고 그 서에서는 다시 전매한 곳으로 조회를 하여 최후까지 구해낼 방침으로 노력”했다. 또 경찰은 “여성을 흉측한 포주의 손에서 다시 북지로 팔아넘기기 전에 그야말로 위기일발”(<매일신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전시체제기 조선의 사회상과 여성동원>에서 재인용) 직전에 구조하기도 했다. 물론 조선인을 포함한 식민지 경찰이 식민지인에게 가혹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법’에 반하는 일을 단속하는 정도의 일은 했고 여성들의 위안소행을 막으려 노력했던 흔적도 보인다. 제국 일본의 군부와 업자는 언제나 공범은 아니었다. 속아서 위안소에 온 경우 군부가 다른 곳에 취직시켰다는 케이스는 그것을 보여준다.(나가사와 겐이치, <한구위안소>) 혹은 너무 어리면 돌려보내기도 했다.(<제국의 위안부>) 이 두 가지 사실은, 군부의 기본 방침은 사기나 납치성 인신매매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민지 경찰은 계약서를 쓰도록 업자에게 지침을 내렸고, 위안부가 될 당사자에게도 도항허가원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듯 ‘계약’이라는 올가미에 묶인 위안부가 ‘폐업’을 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몸값의 소유자인 ‘업자’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업자에는 일본인도 많았다. 특히 규모가 큰 유곽 등은 오히려 일본인 업자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니시노 루미코 외,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와>) 국가정책에 협력해 경제/이윤을 추구했던 중간계급의 문제를 보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남성의 책임은 물론, 빈곤계층을 착취한 이들의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일본이라는 민족주체와 다른 주체의 책임을 묻는 일을 오직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주장들은, 계급과 남성의 책임을 은폐한다.

 

 

동지적 관계/제국의 책임

 

“한국 사람이 항상 가난에 빠지니께 꽃다운 색시들을 승낙 아래 돈을 벌러 가는 기야. 그때 돈으로 오십원이나 백원이나 받으면 기한은 5년 기한을 한다던가 3년 기한을 한다던가 이렇게. 전쟁이나 일본 사람한테 당한 사람이 실제로 많거든. 자기가 돈 벌기 위해 가는 사람은 많다고”(<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라는 증언은 오래도록 묻혀왔다. “자기가 돈 벌기 위해” 간 것을 보는 일은 “만주 얘기 난 누구한테 안 혀. 챙피해서… 집에 저렇게 와서 질문하면 당한 일만 얘기해 주지”(<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라는 식으로 자기검열된 증언들이 희석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항상 가난에 빠지니께”라는 이 증언만큼 ‘제국의 지배구조’를 명확히 말한 증언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하나의 목소리로 일원화된 20년 세월 속에서, “강제연행 없었지 싶어”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단 한번도 그 말을 공중 앞에서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할머니가 작고하자 지원단체는 곧바로 “할머니는 국가배상을 원하셨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2014년 6월 나눔의집 소장) 나는 그런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려 했을 뿐이다. 강제든 자발이든, 혹은 매춘 경험이 있건 없건 나는 그들을 피해자로 생각했다.

 

<한겨레> 기사는 조선인 위안부를 “성매매 경험이 없는” 무구한 소녀로 말하고 싶어하지만, 이런 발상은 소녀가 아닌 성년/매춘 여성들을 배제한다. 하지만 이 기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위안부 모집은 30세까지도 허용되고 있었다. 30세 매춘부는 피해자가 아닌 걸까. 1970년 <서울신문>에는 ‘화류계 여성’도 갔다고 분명히 쓰여 있다. 위안부를 ‘소녀’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식민지를 오점 없는 ‘순결한 소녀’로 표상하고자 하는 욕망이 시키는 일이다. 무엇보다 ‘미성년 소녀’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그와는 달랐던 위안부들을 억압한다.

 

내가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다른 데는 몰라도 일본이 북한하고 한국은 줘야지. 대만까지도 이해를 해. 거기도 성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쳤으니께. 우리는 나라를 위해 나가야 한다고 같은 일본 사람 취급 했거든. 이렇게 끌어갔으니께 반드시 보상을 해줘야지. 그러나 중국, 필리핀은 다 영업용으로 돈 벌러 간 거지. 그러니 그건 안 줘도 괜찮고”(<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라는 목소리를 일찍 만났기 때문이다. ‘동지적 관계’가 있었으나 요구되는 구조였고, 그에 따른 ‘동지구조 안의 차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묵살했다.

 

나는 위안부를 조선인 일본군과 같은 징병과 같은 틀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군인’은 보호했지만 ‘위안부’는 보호하지 않았다.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위안부가 하는 일을 근대국가 시스템이 필요시하면서도 경멸했기 때문이다. ‘법’에 의존해 역사를 판단하는 법 지상주의가 아니고도, 역사에 대한 반성, 사죄와 보상은 가능하다. 한일 합의는 일본이 사죄와 보상적 의미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정부간 합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피해자의 생각도 하나가 아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민간 합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

 

원문: 【紹介】朴裕河「法的責任のドグマから抜け出ねば」(『ハンギョレ』2016年2月5日付)

国連女性差別撤廃委員会に向けたアムネスティの提言書

第63会期(2016年2月15日~3月4日)日本審査に向けたアムネスティの提言書(翻訳)


はじめに


国連女性差別撤廃委員会が第 7 回および 8 回の日本政府報告書を審査するにあたり、アムネスティ・インターナショナルは同委員会に対し、以下の情報を提供する。この提言書は、日本社会における女性の権利の尊重、保護および実現状況など権利全般には言及しておらず、日本と韓国の両政府間の合意などの最近の出来事を含む、第二次世界大戦前および戦中の日本軍性奴隷制度の問題に絞っている。

 

第二次世界大戦前および戦中の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度


1932 年から第二次世界大戦中にかけて、アジア太平洋圏の各地で女性たちは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度に組み込まれた。旧日本軍は、年齢、貧困、階級、家族の社会的地位、教育、国籍、民族に基づいて、だましやすく性奴隷制の罠に陥りやすい女性や少女らを標的にした。中には力ずくで連行された者もいた。全員が自由を奪われた中で性奴隷になることを強要された。その結果、生き残った女性たちは、身体的・精神的な病気や孤独、羞恥心、多くの場合は極度の貧困に苦しみ、現在もその苦しみは続いている。

 

日本政府は、この問題に対する法的立場を盾に長らく頑なな態度を崩さず、すべての賠償義務は 1951 年の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やその他の二国間平和条約および協定の下で解決済みであると主張している。アムネスティ・インターナショナルは、これらの条約や協定には性奴隷が含まれておらず、個人が完全な賠償を求める権利を排除していないことから、政府の立場を支持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考えてきた。日本政府が設立した民間基金であるアジア女性基金は、賠償の国際基準を満たしておらず、被害者を沈黙させる手段だとみなされてきた。

 

2013 年 5 月、国連拷問禁止委員会は日本政府に対して、「『慰安婦』問題の解決に向けて、被害者を中心に置く法的および行政的措置を講じること」を強く求めた。同委員会の勧告には、日本政府が軍性奴隷制度に対する法的責任を公式に認めること、政府当局者や公人が制度の存在を否定しようとする発言に反駁すること、関連資料を開示すること、事実を徹底的に調査すること、被害者に賠償の請求権を認めること、そして市民に同制度について教育することなどが含まれていた。

 

アムネスティ・インターナショナルは、第二次世界大戦における性奴隷制度の被害者に正義を果たすよう繰り返し日本政府に訴え、日本は国際法の下、戦争犯罪や人道に対する罪を構成するこれらの犯罪への全面的かつ実効的な賠償を行う義務があると指摘してきた。最近では 2015年 11 月に日本政府に宛てた公開書簡において、被害者の見解や要求を考慮に入れた被害者中心の解決手法を取ることを強く求めた。

 

日本および韓国政府は 2015 年 12 月 28 日、第二次世界大戦前および戦中の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問題を解決することに合意した。しかし、この合意は(婉曲的に『慰安婦』と称されている)被害者や彼女らを支援する団体の大多数から歓迎されていない。交渉の場に被害者は不在で、合意に関する見解を述べ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自分たちの意思が反映されていないため、交渉は「屈辱的だ」という意見を表明している被害者もいる。

 

日本政府高官や公人は、1932 年から第二次世界大戦終戦までの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度の存在を否定したり、あるいは同制度を正当化し続けてきた。2015 年末に両政府が合意に達した後も、それらの言動が繰り返された。

 

合意のなかで日本の責任を認めたにもかかわらず、日本の公人からは第二次世界大戦前および戦中の日本軍性奴隷制度は許容範囲であるかのような発言が続いている。1 月 14 日、与党自民党議員で元文部科学副大臣の桜田義孝氏は、「慰安婦は職業としての娼婦」と発言した。桜田氏はその後発言を撤回したが、慰安婦に対する組織的な戦争犯罪を葬ろうとする、相も変わらぬ姿勢が、被害者の屈辱と苦悩を長引かせ、彼女たちの尊厳の回復を妨げている。

 

性奴隷制は国際法上の犯罪であることを認め、後世に向けて歴史的事実として記録しておくことは、将来決して同じ過ちを繰り返さないため、そして紛争下における性的暴力犯罪を不処罰にしないための重要な一歩である。しかし、今回の合意は、韓国政府は今後決してこの問題を持ち出さないこと、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度の被害者を記憶するソウルの「平和の碑」を撤去することなどを盛り込んでおり、透明性、真実と和解への取り組みとは逆行するものだろう。

 

中国、フィリピン、シンガポール、マレーシア、インドネシアなどアジア太平洋地域の女性も、旧日本軍により性奴隷を強要されていた。このことについて、菅義偉内閣官房長官は、韓国との合意後、「慰安婦」問題に関して他の国ぐにと新たに交渉を始めるつもりはないことを示唆した。すべての生存者が同様に賠償を受ける権利を得るべきであり、国籍を基に異なる扱いを受けるべきではない。

 

勧告

アムネスティ・インターナショナルは、日本政府に以下を勧告する。

  • 国籍に関わらず、生存する被害者、故被害者、その家族を含め、日本軍性奴隷制の直接的な結果として被害を被ったあらゆる個人への十分かつ中身のある賠償を提供すること。
  • 金銭賠償に加え、原状回復、社会復帰、無条件の謝罪、再発防止など、被害者たちが求める物心両面での賠償を提供すること。
  • 賠償請求や裁判所に申し立てるなどの権利を損なう施策は、すべて排除すること。
  • 韓国政府と協力し、これらの賠償措置を実施する実効性ある制度を設置すること。
  • 歴史や公文書、日本の教育制度で使用される教科書に旧日本軍による性奴隷制度の正確な記載を行い、再発防止に努めること。
  • 軍性奴隷制度の事実を否定または正当化しようとする政府関係者および公人の発言に反駁すること。

 

[出典] アムネスティ・インターナショナル

http://www.amnesty.or.jp/library/report/pdf/cedw_2016.pdf

 

JAPAN- SUBMISSION TO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63TH SESSION, 15 FEBRUARY – 4 MARCH 2016

INTRODUCTION
Amnesty International would like to submit the following information for consideration of the United
Nations (UN)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in advance of the review
of Japan’s combined seventh and eighth periodic reports. This briefing does not reflect the full range of concerns of the organization in terms of respect, protection and fulfilment of women’s rights in Japan, but looks solely at the recent developments on the issue of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including the recent bilateral agreement between Japan and Republic of Korea (South Korea).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Women from throughout the Asia-Pacific region were forc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from 1932 through the duration of World War II. The Japanese Imperial Army targeted women and girls who, because of age, poverty, class, family status, education, nationality or ethnicity, were susceptible to being deceived and trapped into the sexual slavery system. Others were abducted by force. All were detained and forced into slavery. Those who survived suffered, and continue to suffer, from physical and mental ill-health, isolation, shame and often extreme poverty as a result of their enslavement.

The Japanese government has made a prolonged and determined effort to hide behind its legal position on the issue and continued to insist that any obligation to provide reparation was settled in the 1951 San Francisco Peace Treaty and other bilateral peace treaties and arrangements. Amnesty International believed the government’s position was untenable, including because the named treaties and agreements did not cover acts of sexual slavery, and did not preclude individuals from seeking full reparation. The Asian Women’s Fund (AWF), a private fund esta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failed to meet international standards on reparation and was perceived by the survivors as a way of buying their silence.

In May 2013, the UN Committee against Torture urged Japan “to take immediate and effective legislative and administrative measures to find a ”victim-centred” resolution for the issues of “comfort women””. This recommendation urged the State to publicly acknowledge legal responsibility, refute attempts to deny the facts by government authorities and public figures, disclose related materials, investigate the facts thoroughly, recognize the survivors’ right to redress, and educate the public about the system.

Amnesty International has repeatedly called on the government of Japan to provide justice for the survivors of Japan’s World War II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and noted that Japan has an obligation under international law to provide full and effective reparation for these crimes, which may constitute war crime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As recently as November 2015, Amnesty urged the Japanese government in an open letter to adopt a “victim-centred” approach to the issue that took into account the views and needs of the survivors themselves.

On 28 December 2015, Japan and South Korea reached an agreement to resolve the issue of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However, this agreement has not been welcomed by majority of survivors (euphemistically referred to as “comfort women”) and the organizations that support of them. Survivors were missing from the negotiation table and were not able to contribute their views concerning the agreement. Some survivors have since expressed the opinion that the deal is “humiliating” because the will of survivors is not reflected. Amnesty International had noted previously that senior Japanese government officials and public figures continued to deny the existence of a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from 1932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 or justified the existence of this system and this has continued even after the agreement was reached at the end of 2015.

Contrary to the agreement, which acknowledges Japan’s responsibility, high-profile public figures in Japan continue to make remarks implying that military sexual slavery before and during WW II was acceptable. On 14 January 2016, a senior member of the leading party Liberal Democratic Party(LDP), Yoshitaka Sakurada, a former state minister of education, made remarks that “comfort women” were “professional prostitutes”.5 Though he later retracted his remarks, the continued attempt to undermine systematic war crimes against ”comfort women“ prolongs the humiliation and suffering of the survivors and fails to restore their dignity.

Acknowledging these crimes under international law, and factually recording them in histories for future generations is an important step to ensure non-repetition and end impunity for crimes of sexual violence committed during armed conflicts. The new agreement, which includes a provision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never again raise the issue and that a Peace Monument in Seoul commemorating the survivors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be removed, seems to run counter to efforts of transparency, truth and reconciliation.

While women from across the Asia-Pacific region, including in China, the Philippines, Singapore, Malaya and Indonesia, were also forc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the Cabinet Secretariat Chief Yoshihide Suga indicated that Japan does not intend to launch new negotiations on the “comfort women” issue with other countries after reaching a deal with South Korea.6 All survivors should have the same access to redress and should not be treated differently based on their nationality.

RECOMMENDATIONS

Amnesty International calls on the Japanese authorities to:

  • Seek to provide full and effective reparation to any individual who has suffered harm as the direct result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including survivors, non-surviving victims and their families regardless of their nationality;
  • Offer, in addition to compensation, other forms of reparation identified by survivors including measures of restitution, rehabilitation, satisfaction and guarantees of non-repetition;
  • Reject measures, which may undermine the right of survivors, including their ability to seek reparation and access to justice before courts;
  • Work with the government of South Korea to ensure that effective systems are put in place to implement reparation measures;
  • Ensure non-repetition by including an accurate account of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including in histories, public documents and textbooks used in the Japanese educational system.
  • Refute statements made by government authorities and public figures attempting to deny or justify the military sexual slavery system.

 

[出典] https://www.amnesty.org/en/documents/eur42/3305/2016/en/

 

 

논단 예보: "『제국의 위안부』 실은 전부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현상의 시작

 아마도 2016년은 실은 전부터 『제국의 위안부』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고 언급하기 시작하는 '지식인'이 늘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결함을 이해해서가 아니라(그것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작년 12월에 한일 '합의'가 성립되어 박유하가 그 정치적 역할을 끝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단인으로서는 슬슬 『제국의 위안부』를 잘라내고 탈출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부터 철저히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점이 비판될 박유하와 동반추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어떠한 논리가 사용될까. 어쨌든 2015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포스트 '합의'의 처세술에 속아서는 안 된다.

 

(정영환)

원문: 論壇予報:「『帝国の慰安婦』実は大したことないと思ってた」現象の始ま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