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씨의 「반론」에 대하여

박유하 씨 (이하 경칭 생략)가 나의 비판에 대하여 Facebook에 「반론」을 제기한 것을 알았다. 「나의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아래에 일부를 소개한다.

 

정영환 교수는 나의 글쓰기 방식이 일본에 영합하고 그들의 책임을 무화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는 식으로 쓰는데 그치지 않고 "누가 나를 지지하는지를 보겠다"고까지 썼었다. 물론 그와 그의 주변인물들이 취하는 "방법"은, 자신들과 다른 방식을 취하는 진보를 끝없이 "우익에 친화적"이라거나 "우익" 이라는 말로 손가락질하고 규탄하는 일이다. 

오늘아침에도 어떤 이가 험한 욕과 함께 그의 글--"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을 보내왔다. 정교수의 비방은 확실하게 효과를 거두고 있지만, 나를 비방할 시간이 있으면 일본정부나 우익을 설득하는데 시간을 더 쏟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헤이트스피치가 격화되었을 때 그들을 향해 일본어 트위터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정말은, 혐한감정을 갖는 이들과 싸워왔던 일본인과 교포들에게 또다른 유효한 논거와 논지를 제공하려 한 것이 나의 진짜 의도였다. 그것이 나의 "방법"이다. 

(…중략…) 정영환 교수 주변인물들은 나에 대한 비판은 속속 한국어로 번역해 올리지만 저는 여지껏 그런 조직적인 대응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원단체의 고발을 대표적인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나서서 지지하는 형국에 와 있으니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듯 합니다.

 

 비판자들이 자신을 '우익' 취급하고 있다는 '반론'은,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박유하가 반복해 온 것이지만, 이러한 논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우선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만 의견을 남기고자 한다. 먼저 박유하은 번역자에 대해서 "주변 인물" 운운하며 무시무시한 표현을 썼는데, 한국어 번역은 어디까지나 번역자의 선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나는 번역자와 면식도 없다). 번역자의 명예를 위해 밝혀 둔다. 번역자 분들 덕분에 한국의 많은 분들이 읽으실 기회를 얻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으로 나의 비판은 "비방"이 아니다. 나는 비판에 임하면서 책의 내용에 입각해서 논하려고 유의했다. 일본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 양쪽을 참조하여 문제 부분을 지적함에 있어서는 해당 부분을 인용했으며 되도록 근거를 제시하여 비판했다. 단순한 비방이나 욕설이 아니라는 것은 내 비판을 일독하면 분명할 것이다. 자세히 읽은 것에 감사하기는 커녕, "비방" 이라며 비방하는 것은 뜻밖이다. 

또한 본서의 "방법"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 책이 "일본에 영합하여 그들의 책임을 무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의 "방법" 상의 문제가 몇 가지 있다. 먼저 논지에 관련된 중요한 개념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조차 없이 서로 모순되는 서술이 산견되므로 논지를 읽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는 점, 다음으로 증언이나 사료의 자의적인 사용이 눈에 띄며,  주장의 논거가 된 사료나 선행연구의 대부분이 애초에 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방법"의 비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적절한 "방법"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군책임 부정론,  전후 보상 문제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근거한 국민기금에 대한 찬사, '위안부' 여성이나 정대협에 도를 넘은 "비방" 등 을 통해, 확실히 이 책은 "일본에 영합하고  그들의 책임을 무화시키는 방향"으로 명확하게 독자를 이끌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의 "방법"의 부실함은 이런 문제가 있는 주장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이 책의 다양한 가설은 선행연구나 사료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채 확고한 명제 = 전제로 간주되어, 이 전제를 바탕으로 증언이나 사료가 편의적으로 짜깁기된다. 예상되는 비판에 대해서는, 변명적인 언사를 곳곳에 섞어둠으로써 미리 차단하려고 하여, 그 결과 서술은 한층 혼란에 빠진다. 무리한 결론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어설픈 방법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폭력의 피해자들의 삶과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에 개입하려는 자가 취해야 할 "방법"이 아니다.

위의 「반론」에서 박유하는 내가 "누가 나(박유하)를 지지하는지 보겠다고까지 썼다"고 하지만 부정확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본서에 대해서는 재빨리 일본에서는 호의적인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서의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누가 어떠한 형태로 호의적으로 소개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본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대응을 통해 평자들의 ‘견식’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2)」 )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서의 "방법"의 문제는 나 이외에도 몇 가지 비판이 나타났다.【1】 모두 이 책의 초보적인 실수나 부적절한 출전 참조를 지적한 설득력 있는 비판이다. 만약 일본 언론 · 학계가 최소한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 책과 같은 서적은 시장에 나돌지 않을 것이다. 그 주장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의 비판 이전에, 참고 문헌과의 단순한 비교 대조로 분쇄되어 버리는 책(반대로 말하면, 독자의 신뢰를 배신하고 터무니없는 부담을 지우는 책)을 간행하는 것은 저자뿐만 아니라 출판사의 신용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출판은 제조물 책임을 엄중히 추궁당해야 할 것이다.

 

*주

【1】『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블로그를 함께 참조하기 바란다.

「"기모노・일본 머리의 조선인 위안부 사진"이란?: 『제국의 위안부』 사적 의견(1) 」(블로그 「역사수정주의와 레이시즘을 생각하다」)

http://nogawam.blogspot.jp/2015/02/blog-post_22.html

 

「『제국의 위안부』의 "평균 연령 25세"의 오류: 『제국의 위안부』 사적 의견(2)」(위와 같음)

http://nogawam.blogspot.jp/2015/03/25.html

 

「『제국의 위안부』의 놀란만한 시대착오에 대해서: 『제국의 위안부』 사적 의견(3)」(위와 같음)

http://nogawam.blogspot.jp/2015/03/blog-post_28.html

 

「『제국의 위안부』의 증언자 '부풀리기'에 대하여」('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보도를 재검증하는 모임 블로그)

http://readingcw.blogspot.jp/2015/03/blog-post_20.html

 

「일본정부는 『제국의 위안부』의 명백한 잘못에 정정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일까?」(블로그 「단상의 메모장」)

http://d.hatena.ne.jp/yasugoro_2012/20150328/1427565738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부교수 정영환

 

朴裕河氏の「反論」につい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