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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3항목 ‘합의’와 이론 봉합 ‘외주’의 구조

  박유하의 페이스북에 어제 한일 양 정부의 3항목 ‘합의’에 대한 감상이 쓰여 있었다. 아래에 전문을 인용한다.

 

  거짓말처럼, 위안부문제가 타결되었다. 정부끼리도 시작전부터 삐그덕거리기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라는 의미에서의 "해결"로 가기까진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벌써 지원단체와 당사자 간의 이견마저 보인다. 너무 서둔 감이 있다.

  이런 일이 없도록, 나는 대립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협의체를 만들어서 몇가지 논점에 대해 토론하도록 하고 그 논의를 언론과 관계자들에게 공개해 당사자와 양국국민이 "인식에서의 합의"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결과에 근거해 해결책도 찾을 수 있도록. 

("국회결의"가 있기를 바랐지만 그건 위안부문제뿐 아니라 식민지배 전반에 대한 것이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기다려봐야겠다. )

  아무튼 결정된 이상, 이제 남은 일은 이런 결정이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해 검토하고, 뒤늦게라도 납득에 기반한 국민적 합의에 이르는 일일 것이다. 위안부할머니들 "당사자"의 생각과 선택과는 별개로.

  일본의 경우는 오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죄/보상에 부정적이었던 일부 우익과 지원자들의 일부인 듯하다. 말하자면 대다수 일본국민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에 공감한다.

  따라서 앞으로 중요해 지는 건 한국의 언론과 여론일 것 같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이 필요하다. 좌우로 나뉘는 게 아니라 그저 합리적이면서 윤리적인 판단에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반으로 갈려 대립하는 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의 공통시각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위안부문제 뿐 아니라 다른 국내문제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분열과 대립으로 소모하지 않는 공동체만들기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런 날을 나는 여전히 꿈꾼다.

  위안부문제가 갑자기 타결된 날에.

 나는 박유하의 이러한 평가는 이번 ‘합의’가 배태하는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박유하는 이번 10억 엔 출자를 ‘보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대다수 일본국민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에 공감한다”), 오류이다. 이미 보도되고 있듯이, 일본정부 관계자는 이번 ‘합의’에서 언급된 ‘책임’은 법적 책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3항목의 ‘합의’에서도 보상 따위의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보상’ ‘배상’이라는 말을 극히 부정확하고 자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마치 전후의 일본정부가 ‘보상’ ‘배상’을 지불해 온 것 같은 오해를 확산시켰는데, 이번에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본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며 피해 당사자들이 증언했을 때, 그녀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일본이 전쟁범죄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보상을 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에 힘쓰며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교육의 장에서 미래 세대에게 그 과오를 전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계속해서 선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피해자들의 호소 이후에 벌어진 것은 정반대의 사태였다. 책임 있는 입장의 사람들이 ‘대일본제국’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염치도 없이 태연하게 피해자들을 모욕했다. 놀랍게도 2015년 지금도 문서를 소각한 인물이 전국지에서 그것을 자랑하는 기사가 실리는 것이다. 과거에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덧칠하려는 일본에 그러한 행동을 막고 반성하게 하는 것. 이 ‘일본 문제’야말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을 터이다.

  어제 벌어진 한일 양 정부의 ‘합의’는 이러한 ‘일본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확실히 고노 담화를 계승하는 문언은 ‘합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노 담화가 존재했어도 일본 정치가들은 수도 없이 망언을 반복해 왔다. 그것은 예전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지적했듯이, 본래 고노 담화의 문언 자체에 위안부의 징집, 군위안소 제도의 운용 주체가 업자인 것처럼 읽힐 여지가 남겨져 있어, 국제법 위반,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吉見義明, 『従軍慰安婦』, 岩波新書, 1995). 국민기금이 피해자들한테서 거부당한 것도 고노 담화와 마찬가지로 국가책임과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애매한 ‘해결’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오히려 경제협력이나 ‘위로금(償い金)’을 ‘보상’이라 부름으로써 1990년대의 과오를 일본사회가 직시할 책임을 해제하는 역할을 했다. ‘합의’에서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전쟁범죄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책임을 통감” 운운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이라고 인정하지는 않고 가해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을 지불하는 것도 명기되지 않았다. 역사교육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목이 불분명한 재단에 대한 10억 엔 예산 출자에 의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자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한국정부에 확인시켰다. 원점에서 제기되었던 것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박유하는 이번 10억 엔 출자안을 ‘보상’ 따위로 부정확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아울러 당연한 것이지만, 당사자들이나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 단체에서는 재빨리 ‘합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대협 외에 114개 단체의 성명은 아래와 같이 옳게 지적했다. 나는 이 성명에 전면적으로 찬동한다.

  

비록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일본군‘위안부’ 범죄가 일본정부 및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범죄라는 점은 이번 합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관여 수준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과 ‘위안부’ 범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또한 아베 총리가 일본정부를 대표해 내각총리로서 직접 사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독사과’에 그쳤고, 사과의 대상도 너무나 모호해서 ‘진정성이 담긴 사죄’라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이번 발표에서는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범죄의 가해자로서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후속 조치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함에도, 재단을 설립함으로써 그 의무를 슬그머니 피해국 정부에 떠넘기고 손을 떼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이번 합의는 일본 내에서 해야 할 일본군‘위안부’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교육 등의 재발방지 조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모호하고 불완전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한국정부가 내건 약속은 충격적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하고,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를 위해 해결방안을 찾을 것이며, 상호 국제사회에서 비난/비판을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되를 받기 위해 말로 줘버린 한국정부의 외교 행태는 가히 굴욕적이다.

 그런데 박유하는 이러한 ‘합의’에 대한 이론을 졸속적인 과정의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이런 결정이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해 검토하고, 뒤늦게라도 납득에 기반한 국민적 합의에 이르는 일일 것이다”라는 극히 박유하적인 문장에서, 전단에서는 결정의 정당성 자체를 재검토할 가능성을 박유하가 인정하는 듯이 썼지만, 물론 결정을 뒤집는 일 따위는 상정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결정을 전제로 “ 뒤늦게라도 납득에 기반한 국민적 합의에 이르는”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당연히 바로 이쪽에 박유하의 의사가 제시되어 있다. 어쨌든 ‘합의’ 내용을 전제로 다양한 방법을 써서 당사자나 정대협을 ‘합의’시켜 가자는 것이다.

 아마도 ‘합의’가 초래하는 최대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번 ‘합의’에서 한국정부는 당사자에 대한 설득과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도 포함한 교섭을 담당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말하자면 일본정부는 이론의 봉합을 한국정부에 ‘외주’한 것이다. 이제 일본정부에는 스스로 교섭할 고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정부와 당사자들이 다투는 것을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기만 하면 된다. 일본정부는 문제를 한국의 국내문제로 바꿔치기해 버렸다. ‘합의’에 이론이 있는 자들은 앞으로는 일본정부뿐만 아니라, 그 앞에 버티고 있는 한국정부를 먼저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유하적 ‘화해’가 초래한 이론 봉합 ‘외주’의 구조이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일본의 대형 미디어의 논조는 기본적으로 문제 ‘해결’에 대한 환영 일색이다. ‘외주’의 꿀맛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정부에 대해 소녀상 이전도 포함한 합의사항을 ‘지원 단체’에 받아들이게 하라고 입을 모아 주문을 하고 있다. 『마이니치』, 『아사히』의 사설을 인용한다.

 

다만 획기적인 합의라도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남는다. 그럴 때에 대국적 견지에서 국내를 통합해 가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이 강하게 문제시하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의 철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의 상징이 되어 있는 만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화해로 이어지는 역사적 합의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작업이 남아 있다. 한일 양국이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毎日新聞』, 2015년 12월 29일자 사설)

 

양 정부 모두 위안부들의 지원자 등 시민단체, 미디어도 포함해서 당시의 교훈을 생각해 보자. 새로 설립될 재단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채울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생존자가 50명도 남지 않게 된 위안부들 각각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이다. 한국의 지원 단체는 합의에 대해 “피해자나 국민을 배반하는 외교적 담합”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일본 측에서도 내셔널리즘에 휩쓸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쉽다. 하지만 이번 합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쌓아 가는 데에 귀중한 토대의 하나가 된다. 일본정부는 성실히 합의를 이행하고 한국정부는 신중히 국내에서의 대화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 길은 없다.(『朝日新聞』, 2015년 12월 29일자 사설)

  ‘외주 만세!’라고 해야 할까. ‘대화’ 등등의 듣기에 좋은 표현은 사용했지만, 양 신문 모두 한일의 ‘합의’를 뒤집는 선택지 등은 애초에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합의’ 사항의 강요에 다름 아니다. 그저 일본의 식자나 보도의 논조는 많든 적든  이런 식이다. 정대협을 한국정부가 제대로 입 다물게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와 같은 일본의 ‘여론’ 만들기에 가장 공헌한 것은 박유하 자신이다. 『화해를 위하여』,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피해 당사자들이나 정대협,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상을 비판하여 지속적으로 ‘화해’의 장애물 취급한 것은 다름 아닌 박유하였다.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식의 심화에 공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대협이 ‘화해’의 장애라는 인식을 일본사회, 특히 보도와 출판 관계자에게 심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로테스크한 이론 봉합의 ‘외주’를 일본의 (자칭 리버럴도 포함한)언론인들이 ‘대화’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은 박유하의 ‘화해’ 담론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도 무거운 죄이다.

  2016년은 소녀상 철거를 둘러싼 한국 내의 갈등이 막을 올릴 것이다. ‘외주’의 구조 속에서 더욱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일본에 도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일본 문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정말로 이와 같은 ‘해결’로 만족하는가. 다시 한 번 “대다수의 일본국민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정영환)

 

원문: 日韓三項目「合意」と異論封じ込め「外注」の構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