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박유하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한겨레』 2016년 2월 6일자)

 박유하가 역사수정주의자로서의 마각을 드러냈다. 2016년 2월 6일자 『한겨레』에 게재된 박유하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가 그것이다. 박유하는 이 ‘반론’에서 ‘억울한 일본군론’(나가이 가즈)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 이해를 개진했다. 『한겨레』 일본어판에는 번역되지 않았는데, 박유하의 인식을 드러내는 귀중한 소재이므로, 전문 번역하여 소개한다(『한겨레』 일본어판에 번역이 실리는 대로 삭제하고 편집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개진한 것과 동일한 (1)업자 주범론(=‘전지 공창시설론’), (2)군의 ‘좋은 관여’론, (3)자발적 매춘부론, (4)미성년 징집 예외론에 기초한 일본군의 책임부정론이다. 이 책임 부정론들을 본인은 다양성을 밝혔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자가 매춘 전력이 없는 미성년 징집을 강조하는 것은 매춘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논점 바꾸기와 ‘법’ 운운하는 궤변으로 기만하고 있는 것이 박유하의 「반론」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업자=군속’론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근저에서 뒤집는 주장(사실이라면 군이 직접 관연한 증거이다)이 강조되어 있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한일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한국정부가 포기했다는 주장에 대한 나의 비판에 ‘반론’하기 위하여 박유하가 최근에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박유하의 「반론」을 검증한다: 재론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4)」 참조). 이 주장을 채용하는 것이 종래의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는 것을 박유하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학계’ 운운하는 박유하의 연구사 이해는 기본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조심해서 읽기 바란다.

  

 여유가 있으면 논평하겠지만, 문제점을 간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터이다. 결국 ‘위안소’ 제도가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다만, 나가이의 주장이 ‘강제연행’ 부정론의 ‘논거’로 다루어진 것은 너무가 애처롭다. 아마도 본인이 읽으면 까무러치지 않을까. 박유하의 작업은 하나에서 열까지 이런 식이라서 피인용자들에겐 이런 피해도 없다. 아울러 사료인용처럼 보이는 “ ” 안의 어구는 모두 부정확하므로 "그대로"라고 표시해 두었다. 읽기 쉽도록 적당히 행을 바꾸었다.

 

(정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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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강제연행, 박유하 교수의 반론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한겨레』 2016년 2월 6일자)

 

 

지난 1월23일 <한겨레>에 ‘위안부, 일본 육군이 주체가 된 전형적 인신매매였다’(길윤형 기자)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분명 조선인 위안부 동원은 이른바 ‘군인이 끌어간 물리적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의 틀 안의 일이었다. 사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군인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식의 논의는 하지 않는다. 일본의 강제성과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논의는 고작 이송 시에 일본 군부의 배를 이용했으니 일본 국가 책임이라거나, 속아서 데려왔는데 알고도 묵인했으니 범죄라는 정도의 논의다. 

그런 사실들이 이제껏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관계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사회를 향해 명확히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강간이 존재했지만 위안소에서의 성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대가가 치러진 관계였다는 것도 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혼란과 불신”은 길윤형 기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쉽고 중립적인 언어의 실패” 때문이 아니다. 2014년 8월에 <아사히신문>이 과거의 ‘강제연행’ 기사 내용을 공식적으로 취소, 수정한 이후 비슷한 발언을 한 한국인 학자나 언론 혹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혼란의 원인

 

그러면서도 이 기사는 “위안부 충원의 주체는 일본 육군”임을 “흔들림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건 새삼스럽게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일본이 인정한 일이다. 물론 나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의 지휘하에 사기·협잡으로 강제연행”된 것이 아니다. 업자에게 여러 편의를 주었지만 일본 군부는 “사기와 협잡”은 공식적으로는 금지했다. “부녀매매조약이 조선에서 적용 제외”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기성 모집을 금지하라는 “내무성 경보국장의 통첩”이 조선반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모든 사기를 허용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만 범죄가 허용되었을 거라는 상상을 근거로 나의 책을 “결국 허망”하다고 하는 이 기사의 주장은, 나의 책을 왜곡하고 전국민을 오도한다.

 

나가사키 경찰서 문서에는 “전차금”을 군부가 지급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문서에는 “소개수수료를 군부가 지급”(그 대로)한다고 쓰여 있는데 이 부분을 두고 길 기자는 “일본 군부가 주체가 돼 전차금을 미끼로 여성들을 2년간의 성매매에 종사시키는 전형적인 ‘인신매매’를 시행”했다고 쓴다. 하지만 문서에는 어디까지나 그런 “말”(그대로)을 “매춘업자가 퍼뜨리고 다닌다”(그대로)고 쓰여 있을 뿐이다. 매춘업자가 여성들을 모집한다는 사실이 “일본의 경찰한테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군이 “인신매매를 주도”해서가 아니다. 경찰은 그저 군이 여성들을 업자를 통해 모집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을 뿐이다. 내무성이 “경찰의 반대 의견이 잇따르자 당황”해서 조선에서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증명하는 문구 역시 어디에도 없다. 부녀매매조약에 관한 국제조약이 조선이나 대만에 “유보”되었다는 김부자 교수의 지적은 참고해야 하지만, 그것이 곧 “매춘업에 종사한 적이 없으며 성병이 없는 여성을 식민지인 조선이나 대만에서 대량으로 모집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도항에 관한 “통첩”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조선인의 중국 이동은 배가 아니라 기차로 이동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또 위안부를 데려간 이가 “칼 차고 모자 쓴” “일본 군인”으로 보인다 해서 그가 꼭 일본 군인인 것은 아니다. 길 기자가 인용한 안병직 교수도 말하는 것처럼 일본군은 업자를 군속 대우하기도 했고 그들에게는 군복이 지급되었다. 따라서 “결국 조선에서의 위안부 동원은 일본과 달리 성매매의 경험이 없는 미성년자가 많았고 그 수법도 당시의 일본의 형법 기준으로도 범죄라 할 수 있는 취업사기가 대부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가거나 소녀가 속한 공동체가 알고도 내친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업자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관리”는 관리감독의 의미가 강했고, 업자가 위안부를 착취하지 않도록 했다.

 

 

법’의 한계

 

길윤형 기자의 기사가 결론으로서 인용한 나가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군으로부터 위안부 경영을 위탁받은 민간업자나 모집업자가 사기·위계에 의해 여성을 위안소에 데려와 일을 시켰다.”(그대로) 그리고 “위안소의 관리자인 군은 이를 처벌하지 않고, 사정을 알고도 이를 방치했다면 일본군이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없다. 그런 범죄에 피해자인 여성이 자신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느껴도 놀랄 일이 아니다.”(<세카이> 2015년 9월호)

 

이 부분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사기/위계의 주체는 ‘업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저 군이 알고도 처벌하지 않았으면 강제연행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군부는 당시 오히려 업자가 사기로 데려오지 않도록 계약서를 쓰도록 했고 확인했다.(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 <‘종군위안부’ 관계자료 집성> 2) 물론 계약서를 썼으니 문제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약’이라는 이름의 ‘법’의 존재는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 마찬가지로 오로지 국가배상을 입증하고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강제성을 주장하려는 발상은, 법의 바깥에서 이뤄진 일에 대해서는 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법’이란 국가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고 국가시스템은 근대 이후 언제나 남성중심주의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강제성 여부나 국가배상 여부가 아니라 군대를 위한 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군부의 발상이 어떤 식으로 여성들을 참혹하게 만들었는지다. 강제연행론은 물론 인신매매론도 ‘법적’ 책임에만 구애하는 한, 법을 어기지 않은 공간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성노예’의 주인은 누구인가

 

식민지 경찰은 당시 횡행하던 사기나 유괴를 기본적으로는 단속했다.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진 국민에 대한 법적 보호는 똑같지 않다 해도 식민지에서도 이루어졌다. 식민지 여성들만 사기나 납치에 노출되도록 ‘식민지 경찰’이 부도덕했다는 것은 90만 가까이 살았던 ‘식민지 일본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발언이다. 식민지 경찰은 “포주들의 눈물도 인정도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당시의 경찰도 분히 여기고 그 서에서는 다시 전매한 곳으로 조회를 하여 최후까지 구해낼 방침으로 노력”했다. 또 경찰은 “여성을 흉측한 포주의 손에서 다시 북지로 팔아넘기기 전에 그야말로 위기일발”(<매일신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전시체제기 조선의 사회상과 여성동원>에서 재인용) 직전에 구조하기도 했다. 물론 조선인을 포함한 식민지 경찰이 식민지인에게 가혹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법’에 반하는 일을 단속하는 정도의 일은 했고 여성들의 위안소행을 막으려 노력했던 흔적도 보인다. 제국 일본의 군부와 업자는 언제나 공범은 아니었다. 속아서 위안소에 온 경우 군부가 다른 곳에 취직시켰다는 케이스는 그것을 보여준다.(나가사와 겐이치, <한구위안소>) 혹은 너무 어리면 돌려보내기도 했다.(<제국의 위안부>) 이 두 가지 사실은, 군부의 기본 방침은 사기나 납치성 인신매매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민지 경찰은 계약서를 쓰도록 업자에게 지침을 내렸고, 위안부가 될 당사자에게도 도항허가원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렇듯 ‘계약’이라는 올가미에 묶인 위안부가 ‘폐업’을 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몸값의 소유자인 ‘업자’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업자에는 일본인도 많았다. 특히 규모가 큰 유곽 등은 오히려 일본인 업자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니시노 루미코 외,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와>) 국가정책에 협력해 경제/이윤을 추구했던 중간계급의 문제를 보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남성의 책임은 물론, 빈곤계층을 착취한 이들의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일본이라는 민족주체와 다른 주체의 책임을 묻는 일을 오직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주장들은, 계급과 남성의 책임을 은폐한다.

 

 

동지적 관계/제국의 책임

 

“한국 사람이 항상 가난에 빠지니께 꽃다운 색시들을 승낙 아래 돈을 벌러 가는 기야. 그때 돈으로 오십원이나 백원이나 받으면 기한은 5년 기한을 한다던가 3년 기한을 한다던가 이렇게. 전쟁이나 일본 사람한테 당한 사람이 실제로 많거든. 자기가 돈 벌기 위해 가는 사람은 많다고”(<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라는 증언은 오래도록 묻혀왔다. “자기가 돈 벌기 위해” 간 것을 보는 일은 “만주 얘기 난 누구한테 안 혀. 챙피해서… 집에 저렇게 와서 질문하면 당한 일만 얘기해 주지”(<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라는 식으로 자기검열된 증언들이 희석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항상 가난에 빠지니께”라는 이 증언만큼 ‘제국의 지배구조’를 명확히 말한 증언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하나의 목소리로 일원화된 20년 세월 속에서, “강제연행 없었지 싶어”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단 한번도 그 말을 공중 앞에서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할머니가 작고하자 지원단체는 곧바로 “할머니는 국가배상을 원하셨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2014년 6월 나눔의집 소장) 나는 그런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려 했을 뿐이다. 강제든 자발이든, 혹은 매춘 경험이 있건 없건 나는 그들을 피해자로 생각했다.

 

<한겨레> 기사는 조선인 위안부를 “성매매 경험이 없는” 무구한 소녀로 말하고 싶어하지만, 이런 발상은 소녀가 아닌 성년/매춘 여성들을 배제한다. 하지만 이 기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위안부 모집은 30세까지도 허용되고 있었다. 30세 매춘부는 피해자가 아닌 걸까. 1970년 <서울신문>에는 ‘화류계 여성’도 갔다고 분명히 쓰여 있다. 위안부를 ‘소녀’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식민지를 오점 없는 ‘순결한 소녀’로 표상하고자 하는 욕망이 시키는 일이다. 무엇보다 ‘미성년 소녀’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그와는 달랐던 위안부들을 억압한다.

 

내가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다른 데는 몰라도 일본이 북한하고 한국은 줘야지. 대만까지도 이해를 해. 거기도 성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쳤으니께. 우리는 나라를 위해 나가야 한다고 같은 일본 사람 취급 했거든. 이렇게 끌어갔으니께 반드시 보상을 해줘야지. 그러나 중국, 필리핀은 다 영업용으로 돈 벌러 간 거지. 그러니 그건 안 줘도 괜찮고”(<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라는 목소리를 일찍 만났기 때문이다. ‘동지적 관계’가 있었으나 요구되는 구조였고, 그에 따른 ‘동지구조 안의 차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묵살했다.

 

나는 위안부를 조선인 일본군과 같은 징병과 같은 틀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군인’은 보호했지만 ‘위안부’는 보호하지 않았다.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위안부가 하는 일을 근대국가 시스템이 필요시하면서도 경멸했기 때문이다. ‘법’에 의존해 역사를 판단하는 법 지상주의가 아니고도, 역사에 대한 반성, 사죄와 보상은 가능하다. 한일 합의는 일본이 사죄와 보상적 의미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정부간 합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피해자의 생각도 하나가 아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민간 합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

 

원문: 【紹介】朴裕河「法的責任のドグマから抜け出ねば」(『ハンギョレ』2016年2月5日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