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상 씨 서평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

 

역사학자 정영환 씨가 신간을 간행하셨다. 자세한 것은 정영환 씨의 블로그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east-asian-peace.hatenablog.com/entry/2016/03/15/235641 )

 

재빨리 읽었는데 일본의 논단・저널리즘, 언론계의 참상을 이토록 실감하게 만드는 책도 드물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책은 최근에 출판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고야노 아쓰시(小谷野敦)가 신간 『반미라는 병 별 생각 없이 리버럴(反米という病 なんとなく、リベラル)』(飛鳥新社)에서 정치・사회계 잡지가 팔리지 않게 된 것은 논쟁을 하지 않아서 재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지 스마트폰의 보급 등은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최근에는 출판계・서점계 관계자나 연구자, 저널리스트의 사고가 “별 생각 없이 리버럴”로 획일화되어 버려 많은 독자가 이탈했고, 유사한 사상의 독자를 향한 책 만들기, 북 페어가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악순환).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귀중한 책이다. 대학생, 대학원생이라면 본서를 읽고 자신들 주변의 교원들과 그들/그녀들의 언론의 공허함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본서는 수많은 (리버럴) 지식인이나 저널리즘이 절찬하고 각종 상도 수상한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가 얼마나 비학문적이고 비논리적인지, 피해자의 존엄을 짓밟는 주장을 전개했는지를 이론의 여지없이 철저히 증명한다. 또한 그와 관련하여 많은 저명한 지식인도 비판한다. 읽으면서 독자들은 박유하의 지리멸렬한 주장에 놀라면서 이런 인물의 주장을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검토할 수 있구나 하고 정영환 씨에게 감탄하는 한편으로, 이 『제국의 위안부』가 절찬을 받는 현실의 사태에 전율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감각은 실제로 본서를 차분히 읽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본서는 결론 부분부터 읽는 사람도 꽤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서 말하는 『제국의 위안부』 절찬이라는 사태가 ‘일본군 무죄론’에 의한 ‘대일본제국’ 긍정 소망과 ‘전후 일본’ 긍정 소망이라는 ‘두 개의 역사수정주의’에 홀린 사람들의 욕망이 낳은 산물이라는 지적 같은 정영환 씨의 일본사회와 ‘리버럴’ 분석도 거기에 이르는 면밀한 논증을 시간을 들여 읽은 후에 다시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체험이다.

 

또한 본서는 ‘위안부’ 문제나 ‘보상’ ‘배상’을 둘러싼 논의에 관해서도 절호의 (재)입문서가 될 것이다. 박유하가 자기주장의 정당화를 위해 ‘좌’에서 우까지의 모든 (것으로 보이는) 담론을 이용하므로, 상당히 포괄적인 Q&A의 책이 되어 있다(이것은 정영환 씨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또한 본서는 기본적인 사항부터 꼼꼼하고 명석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에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다만 마지막으로 본서에 쓰여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 두면(정영환 씨도 알고 있겠지만), 현재 박유하 비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한테서도 앞으로 (‘망각을 위한’) 한일‘화해’론이 나올 것이므로(실제로 그런 종류의 인식은 이미 표명되고 있다) 그쪽이 상당히 커다란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해서 그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지 않을까. 또한 박유하의 주장은 실은 식민지근대론, 포스트 콜로니얼리즘과 친화성이 강하게 보이므로, 그러한 이론에 대한 검증(특히 지난 20년 동안 일본에서의 기능)도 필요할 것이다. 박유하가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곡했다는 것보다, 이전에 이 블로그에서 요나하 준(與那覇潤)을 언급했을 때 쓴 것처럼,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라는 책이며 되풀이하지만, 특히 젊은이들에게 권한다.

 

[原文] 鄭栄桓『忘却のための「和解」――『帝国の慰安婦』と日本の責任』(世織書房)(私にも話させ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