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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타 아츠시 「근원은 가부장제 국민 국가 체제」(『제국의 위안부』서평)에 대하여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뒤늦게 『아사히 신문』(2014년12월 7일자 조간)에 게재 된 정치 학자 스기타 아츠시의 『제국의 위안부』 서평을 알았다. 스기타는 이 책 『제국의 위안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정치적 싸움에서 정작 당사자인 여성들이 방치되기 쉬운 것이 문제로 보고 한국의 운동단체측 자료도 인용하면서, 여성들의 삶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중략] 전쟁터에 이동수단 등을 제공한 일본정부에 구조적인 책임이있는 것은 결코 부정 할 수 없지만, 모집이나 운영을 직접 행한 조선인을 포함 업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포함한 본서의 한국어판은 운동단체로부터 고소되었고 저자는 한국에서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나치 고관의 변명도 받아들이고 일부 유대인에 의한 나치 협력도 언급한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사회에서 고립된 경위가 떠오른다.

원래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없으면 여성들이 전쟁터로 갈 일도 없었고 그녀들의 운명은 지배의 기억과 겹친다. 그러나 서양과 한국이 일본만을 비난했기 때문에, 여성차별적인 가부장제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국민국가체제에 문제의 근원이 있음을 망각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임을 지나치게 넓게 파악해서 책임추궁을 어렵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속에서 복잡한 문제에 최대한 공평하게 대하려고 하는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이 문제제기에 일본측이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문제가 제기되였다."

스기타는 본서의 내용에 대하여 근본적인 오해를 하고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의 문제는 "책임을 지나치게 넓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좁게 책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책은 자의적인 논법으로 일본군의 '책임'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권리를 최소화한다. 전후모순이나 자가당착도 꺼리지 않고 정작 정부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정부가 '보상', '배상'을 해왔다고 강변한다. 천황제 파시즘 비판, 전후일본 비판에는 과도하게 반발하는 한편, '책임'을 논하는 단계가 되자마자 구체성을 잃고 그 책임은 수많은 추상개념 -- '제국주의', '파시즘', '가부장제', '국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 로 전가된다. 특히 '구조'라는 개념은 '운명'이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서는 주체, 즉 일본군이나 정부(그리고 사실은 한국정부)의 책임을 해제하는 경우에만 소환된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이러한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은 일본군과 함께 업자의 책임도 추궁하려고 한 것이지 결코 면책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스기타가 박유하를 아렌트에 비유 한 것은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한국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본군의 책임을 한정적으로만 인정하고, 법적책임을 완전히 부정하는것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원래 이 책에서 박유하가 정말로 '업자'의 책임을 물었는지도 의문이다. 박유하는 거듭 이런 논법을 사용한다. 만약 일본군의 책임을 묻는다면, 직접적인 가담자인 업자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그렇다면 조선인 업자의 책임도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다면 물으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업자의 책임추궁으로 박유하는 향하는 것도 아니다. '업자'의 고유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책임추궁 자체에 이 책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개념의 난폭한 다용, 의미심장한 척하는 ' '의 남용과 일관성 없는 키워드 -- '자발과 타의에 의한 동원', '전후' 보상과 '제국 후' 보상, '식민지 지배 사과', '식민지 지배 뒤처리' --에 정치학자로서의 스기타가 의문을 품지 않았는지 궁금하지만, 그것은 놔두자. 가장 큰 문제는 정말로 이 책이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 것일까라는 것이다. 나에게 박유하는 분명히 증언을 선별하여 찬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문장은 충격적이기조차 하다.

 

"한국은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정당성에 의한 '도덕적 오만'을 즐겨 왔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인권을 둘러싼 의식구조에 안주해 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탈제국주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지향성이 죄를 지은 가해자의 수치와 회개를 이해하려고 한 적은 없다. 오만은 상상력이 빈곤하다. 그리고 그런 오만과 규탄은 상대를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런 도덕적 지향성이 상대방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 하는 지배욕망의 뒤틀린 형태가 된 적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뉴스로닷컴』2011년12월13일자)고 하는 위안부의 말은 그런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굴복시키고 싶은 -- 꿇게 하고 싶은 욕망은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일본제국의 이인자로서 구미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역사를 상기하면, 그런 욕망이 새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그것은 식민지화의 상처가 만든 뒤틀린 심리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99-300쪽)

이 매도는 도가 넘은 명예의 침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소송에서 이 부분이 문제가 되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격분하는 당사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스기타의 평가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위안부' 피해자 여성의 말에는 '오만과 규탄', '상대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 한 지배 욕망의 뒤틀린 형태',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라는 최대의 매도를 퍼붓고, 얼토당토않게 '대일본제국의 이인자로서 구미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역사'에 비유한다. 천황 비판은 포로학대와 같은 '강자주의적 욕망'이라고 폄하했다고 하더라도 '생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고  스기타는 평가하는 것일까. 한편 '내가 잘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도 내 운명. 내가 그렇게 다룬 일본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증언은 교묘히 강탈하여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것과 같은 그녀의 말은 갈등을 화해로 이끄는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있다. [중략] 갈등을 해결하는 계기가 결코 체험 자체와 사과 여부에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92-93쪽)고 칭송받는다. 이것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박유하의 주장의 대변이며, 증언의 찬탈이 아닌가.

 

(정영환)

 

杉田敦「根源は家父長制・国民国家体制」(『帝国の慰安婦』書評)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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