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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서평 (일본군 '위안부'문제 간사이 네트워크)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싸움” (아사히)
읽다가 피곤해지는 책이라는 것이 정독을 하고 난 후의 첫인상이다. 피곤하다는 것은 “얼마나 뒤틀렸으면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하는 것을 의미하며, 헛수고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용된 자료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악의인가, 아님 양심인가? 틀림없는 것은, 그녀는 우리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에 대해 분명히 적의를 가지고 있고, 자신이야말로 양심적이라고 ‘보이고 싶다’는 강렬한 의욕을 지니고 있다.

책 말미에 ‘위안부문제를 다루어 온 사람이나 관심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제3의 목소리’가 되어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로 결론 내린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녀 스스로의 의식 속에 있는 입장은 ‘제3의 길’이고, 그녀의 의도대로 일본의 국민기금파의 지식인이나 아사히, 마이니치 등의 리버럴 저널리즘도 격찬하고 있다. 그녀가 무엇을 ‘제3의 길’이라고 제시하고 있는지, 명확히 말하려고 하지 않지만, 책에서 ‘국민 기금’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봐서 ‘국민기금을 피해자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324쪽은 이책의 본질이 그대로 나타나 있고, 비판하고 싶은 점도 많지만, 시간을 허비하면서 이책을 비판을 할 시간보다는 종군위안부운동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태산처럼 쌓여있으니, 그 일을 해야겠고, 여기에서는 기본적인 몇가지만을 비판하려고 한다.

 

1. 일본군‘위안부’피해자는 일본군의 동지인가?

‘동지’라는 자극적인 말로 물의를 빚고 있지만, 박유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말하는 것만큼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들이 강간당할 만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내일의 목숨도 모르는 병사들을 글자 그대로 ‘위안’하고, 때로는 연애관계로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임과 동시에 일본군병사를 고무하는 동료=‘동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이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다. 피해자의 증언으로 유사한 연애 이야기도 자주 들을 수 있고 ‘병사들도 불쌍했다’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특히 ‘위안부’로 강요당한 기간이 길었던 피해자는 ‘위안부’로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상황 속에 있었고, 물론 우리들은 그런 피해자의 감정을 받아들여 운동을 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래도 피해자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녀들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유하는 다르다.

[하기야, 이런 기억(疑似恋愛)은 어디까지 예외이거나 부수적인 기억뿐이 없다는 것도 가능하겠지(역자주:이 문장은 일본어를 아무리 읽어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예를 들어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사랑받고, 마음을 준 상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는 기본적으로는 달아나고 싶은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랑과 기억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은 조선인위안부와 일본병사와 관계가 구조적으로는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지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외견을 배신하는 차별을 내포하면서도.](p.83)

내가 쓴다면, ‘그런 사랑과 마음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억은 단지 예외이거나 부수적인 기억일 뿐이다. 위안부에게 있어서 위안소란 도망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채, 성 행위를 강제하는 장소임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쓸 것이다.

같은 사실을 쓰더라도 ‘피해자이지만 동지’와 ‘동지이지만 피해자’라고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법으로는 후자에 무게가 있는 것이고 결론이 또한 전혀 다르다.
왜 박유하는 집요하게 ‘동지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녀가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운동이 피해자들이 이런 기억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동이 피해자를 유관순같은 독립투사로 만들고 있고, 그것이 역사 왜곡이라고까지 비판한다.

나는 무슨 트집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동지적 관계’ 따위의 말은 절대로 쓰고 싶지 않지만, 피해자의 그런 증언을 부정한 적도 없고, 잊어 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 자신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런 증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도 피해자 자신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피해자들은 ‘일본군에게 성을 제공한 더러운 여자’라고 폄훼당하고, 친일파같은 취급까지 받아 왔다. ‘동지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해방 후에도 치유받을 수 없었던 그녀들의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같은 행위이며, 범죄적인 행위라는 생각조차든다.

 

2. 나쁜 것은 업자인가?
박유하는 나쁜 것은 업자이며, 운동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문제에서 제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의 증언을 구체적으로 인용해 피해자를 속여 데려간 것도, 군을 따라간 것도, 폭력으로 지배한 것도, 빚으로 묶어두고 임금을 주지 않은 것도 업자이므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업자이며 일본 정부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업자의 책임이란 대체 무엇일까? 업자를 찾아내 책임자를 처벌한다면, 박유하는 납득할 수 있는 것일까?

[위안부들의 몸에 남은 상처는 단지 군인들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감금, 강제노동, 구타로 인한 심신의 상처를 만든 것은 업자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업자의 관계도, 시기나 위안소의 장소에 따라(즉 위안소의 형태에 따라)도 다양했다고 여겨진다. 증언에 의하면 일반 요리점부터 오지의 허술한 위안소까지 다양한 형태의 위안소가 등장한다. 그것을 보지 않도록 해 온 것은, 그것을 보는 것이 '일본의 책임'을 면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의 가해성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되고, 위안부문제해결로 연결된다는 사고방식이 중심적이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인위안부를 둘러싼 복잡한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위안소를 둘러싼 책임의 주체를 일본군이나 일본 국가만으로 하여 단순화한 것은, 거꾸로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해결을 어렵게 했다.](p.114)
운동을 하는 측에서는, 식민지로부터 연행된 경우의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생각할 때, 업자의 개입을 무시한 적이 없다. 단지 그것이 일본군의 책임을 면죄할 사유는 안 되고, 일차적 책임을 업자에게 돌아가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전쟁터, 점령지 곳곳에 설치된 위안소에 감언이설로 꾀어 조선인‘위안부’를 데려간 것은 분명히 업자이지만, 위안소를 설치하고, 연행을 하기 위해 교통 수단을 준비한 것은 일본군이다. ‘어디 어디에 수십명의 위안부를 보내라’와 ‘보급’을 요구하고, 또한 배치를 계획한 것도 군이다. 사람을 모집하는 사람과, 관리라는 ‘전문성’을 요하는 더러운 일을 (군이) 업자에게 시킨 것에 불과하다.
박유하는 일본군을 면죄할 의도는 없다고 반박하겠지만, 일본정부에 법적 책임은 묻지 않고 게다가 ‘업자’를 법적책임의 대상으로 상정한다면, 한국인도 또한 공범자로서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위안부가 된 도의적 책임을 물어, ‘그녀들을 지키지 않고 위안부로 만든 가부장제와 국가제도에 의존해 있던 모든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정부의 책임을 면죄하거나, 또는 상대화하여 가볍게 하기 위한 주장이라고 밖에 파악할 수 없다.

 

3.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도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법적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関釜裁判第一審判決에서 ‘입법의 부작위(立法の不作為)’를 인정했듯이, 새로 법을 만들어 사죄와 보상을 해야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법에 따라 재판하라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박유하는 이를(아마 의도적으로) 좁혀서 해석하고 있다.

[군을 지속적으로 파견하기 위해 필요한 위안부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이 윤리에 벗어난 행동이다. 그러나 시스템 자체가 금지되지 않았던 한, 그것을 “법적”으로 추궁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중략) 그러나 강간 폭행이나 폭행과는 다른 시스템이었다 “위안”를 범죄시 하는 것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불가능하다.](p.172)

말해 두지만, ‘위안부’제도는 당시 국내법과 국제법을 보더라도 위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적 책임’의 의미를 좁히고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유엔의 책보고서(書報告書), 미하원을 비롯한 각국의 ‘위안부’결의는 ‘사실오인(事実誤認)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일본정부의 대변자인 듯하다. 문학자가 법률론을 휘두르니 이렇게 가볍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제적인 인권감각으로는 ‘위법’인 것을, ‘식민지지배의 문제를 인권문제로 바꿔치기 하여, 식민지 “위안부”와 점령지 “위안부”을 구별하지 않음으로 잘못된 이해를 심어 주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들이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기금’을 피해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힘입은 바가 크다. 국가가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배상하여 ― ― 즉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해결을 위해서는 입법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유하는 ‘국민기금’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기금은 “자민당과 관료의 합의”을 바탕으로, 전후배상에 관한 조약때문에 직접적인 국가보상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그야말로 “민간 단체의 옷을 입혀” 간접 보상을 목표로 한 정부주도의 것이었다. 이른바 기금은, 국가보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기 위한, 어디까지나 〈수단 〉이었던 것이다. 책임회피때문이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p.263)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겉으로는 그런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해자는 어떻게 진지한 사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 결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은 ‘국민’의 모금으로 마련하고, 사무비용만 국고에서 지출했다. 받는 측은 그것을 ‘모금해 준 사람의 성의’로 볼 수는 있다고 해도, 국가의 성의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며 수령을 거부한 피해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유하는, 이를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운동의 책임이라고 단죄한다. 그러면 운동가는 ‘구걸이 아니다’며 수령을 거부한 피해자에게 ‘이는 실질적인 보상이니까 받아야 한다’라며 피해자를 설득하면 좋았을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은 일본 정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는 실질적인 보상입니까?’라고 추궁당했어도, 절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국민기금으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라고 어필하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위로금이지 보상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일본국민으로부터 모은 성금을 전달할 뿐이라고. 그리고 기금을 받지 않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총리로부터 사죄 편지는 절대로 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일반 상식으로는 우선 사죄가 있고, 보상은 그 다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보상을 받는 것을 전제로 사과문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모욕적인가! 피해자가 성의(국민기금)를 받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지원자들에게 그 의도가 없었더라도, “위안부”=“당사자”들은, 어느새 일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본의 정치운동을 위한 인질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p.266)라는데,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않는 것은 어느 쪽인가 묻고 싶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운동의 전진’이 아니라 운동의 〈검증〉이었다. 위안부들 자신의 〈운동으로부터의 해방〉 때문에 이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일본정부로 하여금 다수의 일본국민의 심정을 대변시키는 것이 아닌가](p.279) 하는데 그 일본의 독선적인 ‘선의’이야말로 ‘국민기금’ 실패의 원인이다. 그녀의, 피해자를 인질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신조의 실현을 위해 운동을 한다는 식의 주장은 정말 참을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본정부가 일본국민 다수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선 일본정부가 가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이다. 일본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이 아니라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이 중요한 것이다.

 

4.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란 어떤 것인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도 많지만 끝이 없으니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래도 마지막에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본어판을 출판하고 나서 나는 위안부들 몇명을 만났습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특별히 친해진 분이 있었습니다. (중략)본서는 본의 아니게, 그리고 뒤늦게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남겨진 우리들은, 그 기억 ― ―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 “용서한다면 일본도 어떻게든 할 것이 아닌가”라고 말해, 일본을 비난하는 말에 편들고 싶지 않다고 하고 있었다. ― ― 그 분의 의지를 함께 계승할 수 있겠죠?](p.13)

나에게는, 박유하가 이 피해자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이 책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그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는 이상 나도 덮기로 한다. 다만 박유하는 이 피해자의 사후, 밝히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 ‘용서한다면 일본도 어떻게든 할 것이 아닌가’― ― 그 사람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고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일본정부가 ‘용서한’ 것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만년을 맞이해, 용서하지 않은 채 한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상황, 특히 아베정부가 들어서고는,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까지 되어 있다. 아베정권은 ‘강제연행은 없었다’라며 ‘아사히신문 보도로 인해 많은 일본인이 상처를 받았다’고 거리낌 없이 발언을 하고 있다.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에 힘쓰기는 커녕 피해자를 훼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마음은 매일 같이 동요된다. 피곤하기도 하다. 상대의 말에 맞춰 그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말을 선택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 피해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수요시위에도 지속적으로 참가를 했다. 박유하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것도 정대협 등 운동단체들 탓이 되는 것일까? 피해자들이 수요데모참가를 원하지 않았는데도 참가했다고 말할 것인가? 박유하는 운동측이 피해자를 인질로 잡고 이용하고 있다는 듯한 이미지를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다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박유하 쪽이 아닌가?

“제국의 위안부”는 마치 ‘제3의 길’을 제기하는 것같은 스타일을 취하면서, 일본정부의 입장에 서있는 것같이 보인다. (고노담화와 ‘국민기금’은 아베정권이라 할지라도 기본자세이다. 현재는.) 박유하는 그런 비판에 대해 제대로 읽지 못한 것(誤讀)이다,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반론을 하지만 책 후반의 대부분은 정대협을 시작으로 한국의 지원단체와 일본운동단체의 비판(정대협이 위안부에 대해 세계에 오해시켰다는), 헌법재판소판결과 크마라스와미보고, 미하원의 결의에 대한 비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건성이고,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운동 단체의 비판은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집요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누구와 누구의 대립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와 일본정부의 대립이다. 결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 ‘제3의 길’은 무엇인가?

박유하는 국제적인 인권감각에 호소하는 운동방침을 비판하며, 한일정부는 곧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민협의회(당사자나 지원자와 지식인을 곁들이는)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간을 정해(6개월, 길면1년) 어쨌든 〈합의〉를 도출하기로 약속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p.312)고 하는데 운동단체가 그런 토론의 장을 일본정부가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해 못하는가? 해결할 마음이 없는 일본정부를 움직이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 비판받고 싶지는 않다.

박유하가 일본정부의 완고한 자세를 모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그곳에 ‘악의’가 잠재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박유하는 우리 운동 측을 비판하며, ‘다시 일본 정부에 기대한다’고 한다. 물론 ‘다시’라는 것은 ‘국민기금’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보다는 먼저, 정말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은 있는가?

 

‘위안부’= ‘당사자’들은 일본의정치운동 때문에 인질이 되어 있다고 당신(박유하)은 말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당신에게 돌려주고 싶다.

 

 

일본군 '위안부'문제 간사이 네트워크  

오카다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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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다이씨

[원문] 日本軍「慰安婦」問題・関西ネットワーク 朴裕河『帝国の慰安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