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서경식 씨와  출판사 '돌베개'의 허락을 얻어 『언어의 감옥에서―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2011, 322-364쪽)에 수록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목차

 

 다른 사람의 이나 눈에 상처를 주면서, 보복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인간과는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魯迅 「죽음」)


‘국민주의’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소위 ‘선진국’의 다수자가 널리 공유하는 ‘국민주의’가 '국경을 넘어 공범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구식민지 종주국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문제 삼으려는 전세계의 진보적 조류에 저항선을 형성하려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또 그와 같은 저항이 ‘화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고 있는 양상,즉 ‘화해라는이름의 폭력’을 비판하고자 한다. 

‘국민주의’란 무엇인가? 나는 이전에 일본의 다수자의 내면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국민주의’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1】  

‘국민주의’란 ‘국가주의’와 구별해서 잠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양자는 모두 영어로는 내셔널리즘이지만, 지금부터 문제 삼으려는 ‘국민주의’는 소위 선진국(구식민지 종주국)의 다수자가 무자각 상태로 가지는 '자국민 중심주의’를 말한다. ‘국민주의’는 대개의 경우, 일반적인 배타적 내셔널리즘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또 당사자들도 내셔널리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주의자는 자신을 내셔널리즘에 반대하는 보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권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여러 권리가 만인에게 보증되는 기본권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국민국가에서는 ‘국민’이라는 조건으로 보증되는 일종의 특권이라는점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국민주의자는 자신들의 특권에 무자각한 것이다. 또 그러한 특권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국민주의자는 ‘외국인’의 무권리 상태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자국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는 둔감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냉담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민주의’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배타적인 ‘국가주의’와 공범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국민주의’적 심성은 근대국가의 국민이라면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구식민지 종주국이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역사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상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1995년에 ‘전후 50년 국회 결의’에 반대하는 우파 세력이 등장한 이래, 일본국가의 행보는역사적인 ‘반동’이라고 부를 만하다. 2006년에 탄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극우정권’이라는 규정이 어울린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은 보수파나 우파에 의해 초래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 국민 다수의 ‘국민주의’적 심성이 보수파나 우파를 크게 부추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일본의 현상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의 위험 요인이다. 이 위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족 간의 연대나 다수자와 소수자 간의 연대가 필요한데 국민주의는 이 ‘연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처음으로 

식민지 책임론


많은 일본 국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중국을 비롯한 피침략 국민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에 대한 패배로 인식한다. 그들은 ‘미국에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중국을 비롯한 피침략 민족의 완강한 저항에 패배했다’는 인식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전후일본의 ‘전쟁 책임’ 논의에서 자국이 행한 전쟁이 부당하고 위법한 침략전쟁이었다는 인식과 반성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중에 일어났던 개개의 행위의 위법성이나 책임의 유무라는 범위(그것조차 불충분했지만)에 ‘전쟁 책임’ 논의가 국한되어 버렸다. 

이 같은 경향은 전쟁 책임’론에서 식민지 지배 책임의 관점이 빠져 있다는 점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탈식민지화는 알제리나 베트남의 피식민지 인민의 해방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였다. 이와는 달리 일본의 탈식민지화는 연합국에 군사적으로 패배한 결과 타율적으로 행해졌다. 따라서 민족해방투쟁에 패배한 결과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전쟁 책임론이란 전시의 범죄 행위가 법을 위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좁은 의미의 ‘전쟁 책임’론의 틀만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지배와 깊이 결합되어 있는 성노예 제도이고, 그 진상규명에는 식민지 지배 그 자체의 책임을 묻는 관점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우파나 극우파는 제쳐두더라도 국민 다수에게 되도록 이 문제를 전시의 범죄 행위라는 좁은 틀 안에 가두어 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앞서 말한 ‘국민주의’에 근거해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일본 국민들은 '포승으로 묶어 강제로 끌고 갔는가’라는 말초적인 사실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 강제성을 완벽히 입증할 수 없는 사례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는 전쟁이나 식민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반성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이 우파나 극우파에 의한 부정론이나 역사수정주의에 유리한 심리적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강제노동 등 국가나 기업이 행한 개개의 행위의 토대에 식민지 지배가 존재하고 그 자체가 위법이라는 주장을 하면, 지금도 "당시에는 식민지 지배를 법으로 금지하지 않았다"와 같은 이유를 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식민지 지배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법'이라는 것은 실은 당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의 주권을 이미 부정한 상태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받은 쪽은 그와 같은 법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은 지역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보상은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지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식민지 지배 책임의 부정이라는 방어선은 소위 선진국이 국제적으로 연계해서 깔아놓은 공동의 방어선이다. 거꾸로 말하면 일본에 조선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전 세계적 조류에 부합하는 보편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이미 12년전에 어느 심포지엄에서 한 적이 었다.【2】 그러나 그 당시 나의 주장은 널리 이해되지도 못했고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위안부’ 제도를비롯한 개개의 국가범죄의 반인권성이나 비인도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이나식민지 지배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 후 노골적인 국가주의적 주장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같은 우파적 국가주의와는 일정한 선을 긋는 리버럴 다수파 사이에서 “일본만 잘못한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이라며 냉소적인 상대주의 혹은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만연하여 일본 국민의 인식수준은 더욱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학회나 시민운동의 일각에서 조그마한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전 세계적인 조류를시야에 넣으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비판적으로 문제삼으려는 움직임도 싹을 틔우고 있다.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정립하기 위해」는 그 같은 문제의식을 선명히 한 논문이다.【3】 이타가키의 주장은 위안부 문제나 강제연행 문제 등을 단순히 전쟁에서의 국가 간 배상문제로 해소해서는 안 되며, 식민지 지배 피해를 하나하나 들어 국가와 기업의 법적 책임을 밝히고 동시에 피해자 개인의 구제를 위해 보상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9년 3월에는 남아프리카 역사 연구자인 나가하라 요코(永原陽子) 연구팀이 『'식민지 책임’론--탈식민지화의 비교사』【4】를 출간했다. 2001년 8월부터 9월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Durban)에서는 국제연합 주최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및 이에 관련되는 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더반회의)가 열렸다. 나가하라는 이 회의에서 발표한 선언이 "식민주의의 책임 추궁을 회피함으로써 성립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질서를 부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7명의 필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식민지 책임이라는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쓴 책이 바로 『'식민지 책임’론』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공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처음으로 

‘도의적 책임’이라는 레토릭

 

앞서 말한 "식민지 지배 책임의 회피"라는 선진국 공통의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빈번히 등장하는 레토릭이 ‘도의적 책임’이다. 일본정부가 '식민지 지배'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한 것은 패전 후 50년이나 지난 1995년의 일이다. 당시 연립정권에서 수상이었던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기자회견에서 “과거의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는 '국책이 잘못된' 것이며, 일본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담화는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사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종래의 정부 입장에서 한발 전진한 것이라 할 수있다. 그러나 담화 발표 당시의 기자회견에서 무라야마 수상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고 한마디로 부정했다. 또 소위 조선'병합'조약은 "도의적으로 부당했다"고 하면서도, 법적 부당성은 인정하지 않아 일본정부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선, 즉 '상징천황제'라 불리는 전후 천황제를 지키고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것, 서로 간에 깊이 관련되는 두 개의 요새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선을 당시 일본정부가 그은 것이다. 

이 선은 담화 발표 이후에도 일본정부가 완강하게 유지하는 방어선이다. 그리고 이 선은 소위 ‘위안부’ 문제에서 국가보상을 끝까지 회피하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에 의한 ‘위무금’ 지출이라는 불투명한 방식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이 지출하는 ‘위무금’은 ‘도의적 책임’의 범위로 해석되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상금을 지출하면 이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의적’이라는 말은 법적 책임을 부인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기능한다. 

우리들은 머지않아 이 같은 레토릭을 다른 문맥에서 만나게 된다. 앞서 말한 2001년 더반회의에서 사상 처음으로 카리브해의 여러 나라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 대한 보상 요구를 제기했다. 그러나 구미 여러 나라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구미 여러 나라들은 겨우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지만 ‘법적 책임’은 단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더반회의 선언에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이 ‘인도에 대한 죄’라는 점은 명기되었지만, 이에 대한 ‘보상의 의무’는 담지 못했다. 구미제국이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논거는 ‘법률 없으면 범죄도 없다”는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었다. 노예제는 현대의 척도에서 보면, ‘인도에 대한 죄’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합법이었다는 논법이다. 

끝까지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고, 그리고 책임 회피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법적 책임’을 부정해 ‘도의적 책임’ 수준에 한정시키려는, 선진국의 공동 방어선을 여기에서 분명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레토릭은 ‘도의’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부정하는 의도적인 오용일 뿐이다. ‘법’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지른 범죄, 혹은 ‘법’의 주체가 되는 것을 역사적으로 부정당해 온 사람들에게 저지른 범죄. 이 범죄들은 현존하는 ‘법’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 범죄들의 책임을 묻고 보상을 하기 위해서는 ‘법’의 상위 개념으로서 ‘도의’를 문제삼아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같은 ‘도의’에 근거해 새로운 법을 세움으로써 ‘도의적 책임론’은 새로운 ‘법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나가하라 요코는 앞에서 언급한 책의 서문에서 “중요한 것은 노예무역이나 식민지 지배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들의,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아프리카사람들의 매매나 소유,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에 가담한 나라들의 책임이지만 죄는 아니”라는 1993년 범아프리카 회의 ‘아브자(Abuja) 선언’의 구절을 소개하면서, “죄’로 성립되든 안 되든(즉, 해당하는 ‘법’이 있든 없든―저자) 물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속죄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아브자 선언’의 주장이 책에서 말하는 ‘식민지 책임’의 문제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구식민지 종주국과 그 국민의 다수파는 ‘도의적’이라는 언어를 책임 회피의 레토릭으로 사용하고, 구피지배 민족은 새로운 법적 책임의 원천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도의라는 개념의 정의를 둘러싼 반식민지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처음으로 

‘기억의 격화’

 

나는 과거에 일본인 다수파의 국민주의적 심성의 중요한 특징을 “앞 세대가 저지른 죄의 책임을 다음 세대인 자신들에게 묻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 하여, 이런 심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5】 

무언가 피해를 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지나간 옛일이며, 앞 세대가 저지른 것이다. 자신들에게 그 책임을 지리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아시아의 피해 민족이 집요하게 문제삼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는 민족성, 풍요로운 일본에 대한 질투 혹은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대항의식 탓이다. 

이 같은 담론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심성은 결코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으며 많은 일본 국민이 공유하고 있다. 실은 이와 같은 현상은 일본인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 이후의 맥락에서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노예제 보상문제에 관계하는 여성변호사 로자 아멜리아 플루멜르(Rosa Amelia Plumelle)에 따르면,【6】 더반회의에서 있었던 폐부를 찌르는 예리한 고발이 선진국의 ‘양심적인 사람들’을 허둥대게 만들었고, 그때부터 피해자의 보상 요구 대한 부정적인 담론이 다수 유포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를 들면, 2002년3월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보상문제―화해 혹은 정치투쟁?’이라는 제목의 학술 심포지엄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기억의 격화(surenchère de la mémoire)를 초래하는 과거 다시 읽기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 세대가 저지른 범죄’(본질적으로는 현재의 사고나 김수성에 근거해 범죄’라고 보는 행위)가 지금 세대가 져야 할 역사적 부채로서 활발하게 파헤쳐지고 있다. 

이에 대해 플루멜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7】

 

‘기억의 격화를 초래하는 과거 다시 읽기’라는 말은 모욕적인 표현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서술해 온 것은 유럽의 전문가뿐이었다. 그들만이 비유럽 세계를 유린했던 자신들의 파괴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 평가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미국대륙에서 있었던 제노사이드의 후예인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 미국인뿐만 아니라 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 지역에 사는 모든 아프리카 출신자를 포함함)의 존엄은 백인 지배 하에서 법·제도에서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에서도 줄곧 부정당해 왔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과거의 세대가 저지른 공상空想의 죄 따위가 아니다. 과거의 노예무역 국가, 노예제 국가, 식민지 국가가 총력을 다해 제도화해 몇 세기 동안 자행했던 제노사이드를 문제삼는 것이다. 노예무역 국가나 노예제 국가가 희생자들에게 지고 있는 부채. 이는 ‘과거의 세대가 저지른’ 행위 탓에 현재의 세대’에게 전가되는 ‘역사적 부채’가 아니다. 이는 ‘몇몇 세대’에 의해 자행된 행위가 아니라, ‘여러 국가들’에 의해 자행된 행위였다.노예무역 국가는 수백만 명의 비유럽 남녀나 아이들을 조직적으로 노예로 삼고 대량으로 살육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경제적·군사적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 재앙은 비유럽의 해당 지역에 지속적 빈곤과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이 지역들의 주민과 그 출신자에 대한 보상 의무에 응하는 것은 과거의 노예무역 국가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구미제국은 나치즘으로 제노사이드를 경험했다. 이 경험을 거쳐 구미제국은 ‘인도의 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2001년 더반회의는 구미제국이 지신들이 저지른 노예무역, 노예제, 식민지 지배에 ‘인도에 대한 죄’라는 기준을 적용할 가능성을 공적으로 처음 논의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은 퇴장했고 유럽 여러 나라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의적 책임’이라는 방어선 뒤로 숨었다.

이 회의가 폐회되고 사흘 후 9.11사건이 일어났다. 마치 더반회의를 보고 식민지 지배 책임과 보상 문제를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갈 가능성에 절망한 자들이 구미제국에 응답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건이었다.

그 후의 세계에서는 화해를 방해하는 것이 책임을 회피하는 가해자 측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측이라는 본말이 전도된 담론이 확산되었다. 또한 ‘화해’라는 레토릭을 사용해 피해자 측에게 기정사실에 굴복하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이를 비판하거나 이에 저항하려는 자들에게는 항상 ‘원리주의자, ‘윤리주의자, ‘과격파’, ‘내셔널리스트’, ‘테러리스트’ 같은 낙인이 찍혔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은 처음으로 ‘증언의 시대’를 맞이했다. 일본 국민의 다수가 가해의 역사와 대면하고 대화를 통해 과거를 극복함으로써 피해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기를 열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 전반의 우경화와 함께 역사 문제에서도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기술이 대폭 줄어드는 등 일본사회는 반동의 시대로 돌입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 식민지 지배 피해지들은 우파나 역사수정주의자로부터의 폭력뿐만 아니라, 중간파 다수자로부터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화해를 위해서?

 

여기에서 말하는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의 대표적 사례를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8】가 일본에서 이상할 정도로 환영받은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한 듯하지만, 일본에서는 리버럴로 간주되는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大仏次郞) 논단상을 수상하는 등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지은이 박유하에게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해 자신의 주장을 펼 기회가 주어졌다.

이 책은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라는 네 개의 논점을 둘러싼 한일 간 인식의 어긋남과 대립을 다루고 있다. 용어 오용, 사실 오인, 선행 연구나 관련 문헌의 자의적 인용 등이 많아 높이 평가할 만한 책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김부자(金富子)의 「‘위안부’ 문제와 탈식민지주의―역사수정주의적인 ‘화해’에 대한 저항」【9】이 광범위한 논점에 걸쳐 철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소개해 두고자 한다. 하지만 박유하의 책은 발행부수가 수백만 부에 달하는 『아사히신문』에 반복해서 소개된 반면, 김부자의 비판은 사실상 일반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매체에 게재되어 압도적으로 비대칭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박유하는 책에서 스스로를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은 일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근거 없는 불신’을 품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이 근거 없는 ‘불신’이 두 나라 사이에 반복되는 ‘불화’의 원인이라 단언한다. 그리고 그 같은 일본에 대한 무지와 불신의 원인이 내셔널리즘에 있다고 밝힌 다음, 피해자 측이 가해자 측을 용서함으로써 ‘화해’를 실현하자고 호소한다.

이하 그 대표적인 레토릭을 소개한다.

 

①그 동안 한국에서는 어떤 문제든 늘 ‘반성 없는 일본’으로 생각되기 일쑤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 우파들의 발언과 행동의 배경에 일본의 전후 교육과 교과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점이 있다. (중략) 그러나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 소위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낳은 것 역시 다름 아닌 전후 일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그리고 그들이 아직 다수인 것이 분명한 이상, 일본이 전후에 지향했던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대전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10】

 

인용문의 첫 번째 줄은 문법적으로 보아서 정확하지 않지만, 이는 제쳐두고, 이같이 단정하는 난폭한 말투에 박유하 레토릭의 특징이 있다. “어떤 문제든 늘”이라는 것은 정말일까?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문장을 읽어보면, 이는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불성실한 단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 우피들의 발언과 행동의 배경에 일본의 전후 교육과 교과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점이 있다”는 레토릭은 이해’라는 말의 용법이 미묘하다. 이러이러한 ‘사실’에 대해 많은 한국인이 ‘무지’하다고 하는 것이라면, 이는 명백히 사실에 반한다. 일본의 우파가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표적으로 해 왔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특히 박유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한 민주화 운동이나 시민운동에 관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식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박유하는 여기에서는 ‘무지’라 하지 않고 “이해가 없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은 누구일까?

박유하는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 “전후 일본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고이즈미 수상이 과거의 식민지화와 전쟁에 대해서 ‘참회’하고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저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언명하고 있으니, 전쟁을 ‘미화’하고 있 는 것으로 되지는 않을 터이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고이즈미 수상을 ‘신뢰’하는 것은 자유지만, 보수 여당과 정부가 한 몸이 되어 전후 헌법의 재군비 포기, 전쟁 포기 조항, 정교분리원칙을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공동화시켜 온 “전후 일본의 행보”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신뢰’는 불가능한 것이 상식이지 않을까?

분명히 말하자면, 박유하야말로 일본 우파의 “발언과 행동의 배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박유하가 비판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등 한국의 시민운동권 사람들은 박유하와 다른 방법으로(내가 보기에는 박유하보다도 정확하게) 일본 우파의 언동 배경을 이해하고 있다. 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반성 없는 일본’이라고 비판해 온 것이 아니다. 그 위험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부분 ①의 뒷부분도 마찬가지다. 전후 일본이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을 낳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양심적 지식인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양심적인 사람들이 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재일조선인에 대한차별이나 ‘북조선 때리기’에 왜 제동이 걸리지 않는가)?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는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왜 천황제는 유지·강화되고 있는가)? 나 자신은 박유하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내 견해는 어찌 되었든, 여기에 열거된 문제들은 일본사회에서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논점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유하가 이 같은 문제를 분석·검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분석·검증하면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몰이해’를 강조하는 재료로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야말로 ‘일본’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데 ‘한국’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조잡한 논법에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②그 동안의 우리의 비판에는 일본의 전후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 좌파가 ‘새로운’ 일본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진 적은 없었다. 우파가 생각하는 ‘억울함’--피해의식이 과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말하자면 좌파의 노력에도 우파의 피해의식에도 제대로 맞대면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아는 일이 수반되지 않았던 한국과 중국의 비난은 우파의 반발을 더욱 거세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11】

 

“우리의 비판”이란 말이 일본어판에서는 “한국의 비판”으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의 비판”이라는 것 또한 조잡한 말투다. 이 ‘한국’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정부인가? 국민의 다수인가? 지식인인가? 민주화 운동이나 시민운동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저자가 그려 보이는 ‘한국’의 상은 이문열, 조정래 등 대중문학 작가의 언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등의 보수파 미디어에서 시작해, 노무현 정권이나 정대협 등의 시민운동단체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립하고 있는 다종다양한 정치적 주장이나 사회적 입장의 차이를 무시하고 이를 포괄한 조잡한 표현이다. 박유하는 이같이 포괄한 ‘한국’의 상을 식민지 지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에 대한 몰이해와 불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그린다. 그 위에서 그런 ‘한국’과 ‘민주적이고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가 존재하는 일본’이라는 대립도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한국 내부에 배타적 국가주의자도 있지만 동시에 (박유하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지만) 국가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개인이나 단체도 많다. 또한 일본은 어떤가? 식민지 지배 책임의 인식과 극복이라는 점에 한해서 말해도 일본의 시민사회가 건전한 기능을 다해 왔다고는 할 수 없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서 서로 대립하는 요소만을 끄집어내어 이를 강조하고 이에 포괄적으로 ‘한국’, ‘일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박유하는 국민기금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의 대표로 들고 있다. 그리고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정대협 등을 ‘몰이해의 한국’의 대표로 든다. 하지만 일본 국내에도 국민기금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이 사람들은 한국의 시민운동과 연대를 하고 있다. 이 일본인들은 (박유하보다도) 일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을 이제는 일본인이 아닌, ‘비국민’이라 할 것인가? 박유하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식민지 지배의 극복을 지향하는지의 여부에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일본어판 『화해를 위해서』에서 기술의 주어는 거의 ‘한국’이다. 그런데 한 국 원저에서는 ‘우리’다. 원래 ‘우리’와 ‘한국’은 등식으로 이을 수 없는 것인데, 일본을 잘 알고 일본어도 잘한다고 자임하는 저지이니 이 번역어는 충분한 숙고를 거쳐 사용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점에 박유하식 레토릭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박유하가 ‘우리라는 말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는지는 모호하다. 어떤 때는 자기비판인 듯하고 어떤 때는 한국내의 특정 세력이나 조류에 대한 비판인 듯하다. ‘한국’의 누구를 비판하는지, 그 대상을 엄밀하게 특정해서 구체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해야 한다.

‘우리=한국’이라는 용어의 효과에 의해 적지 않은 일본의 독자는 ‘한국’에 대해 품고 있는 잘못된 스테레오타입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고, 동시에 이를 ‘한국’ 안에서 나온 성실한 자기비판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국은 이렇다’고 단언해 주는 ‘한국인’만큼, 일본인 다수자에게 알기 쉬운 존재는 없다. 그러나 그 ‘알기 쉬움’은 오해를 부추기고 진정한 이해를 막기만 할 뿐이다.

 

③다시 ‘식민지 지배 책임 개념’(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일본 지식인의 주장은 윤리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그것(조선‘병합’--일본어판)이 ‘법’적으로 옳았다면, 여전히 한국 쪽에 그것(식민지 지배 책임--저자)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1905년의 조약이 ‘불법’이라고 말하는 일(이태진 등)이 자국이 과거에 해버린 일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한일협정의 부실함을 들어 재협정을 요구하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일은 무책임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왔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12】

 

이미 말한 것처럼,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개념은 일본 지식인이 먼저 주장한 것이 아니다. 많은 피해자들과 재일 조선인 등이 장기간에 걸쳐 요구하고 투쟁해 온 결과 겨우 최근에 와서야 부상한 개념이다. 게다가 그 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은 일본사회 전체에서 보면 아직 미미한 소수파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개념에 박유하 자신은 “윤리적으로는 옳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반대하는 듯하다. 분명히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법적 책임’은 완강하게 계속 부정하는 선진국의 레토릭과 같다.박유하에 따르면, 당시의 법에 비추어보아 ‘옳다’는 조약은 가령 불평등조약이어도 반대해서는 안 되는 듯하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이 과거의 대한제국이 강제당한 조약을 부정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을 ‘책임의식의 결여’라고 하는 것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의 일본거주권의 역사적 정당성이 무시되어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상황을 고정화시켜 버렸다. 또 이 조약은 한국정부를 “조선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간주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적대시하는 가운데 맺어진 것이다. 재일조선인 중에서도 ‘한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협정영주권을 부여하고 조선적은 불안정한 재류권으로 방치하는 등 재일조선인 사회의 민족분단을 고정시켰다. 또 이 조약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내의 군사독재 반대운동을 탄압하면서 맺은 것이다. 이 조약은 냉전체제하에서 강요된 불평등조약이라 할 수 있다. 박유하에 따르면, 이를 고치자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다면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일본인들도 무책임하다는 것일까?

박유하에게 책임 있는 지식인이란, 예를 들면 아무리 반인권적이고 비인도적이어도 국가가 일단 맺은 조약에는 마지막까지 묵묵히 따르는 사람을 말하는 듯하다. 이 정도로 국가권력을 기쁘게 하고 식민지 지배자나 그 후계자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레토릭은 없을 것이다.

앞의 인용문 중 끝부분의 문장은 한국어판의 원서에는 없고 일본어판에만 덧붙인 것이다. 왜 박유하는 이 같은 문장을 덧붙였을까? 박유하는 일본어판 ‘후기’에 “일본어판을 내면서 일본에 대한 비판을 조금 가필했다. 그 이유는 그 장소에 필요한 책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쓰고 있다. 그렇지만 덧붙인 한 줄의 문장을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까? “그 장소에 필요한 책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는 것이 저자의 본심이라면, 어떤 층의 일본 독자에게 영합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필요’인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문장은 사실에 반한다. 박유하가 여기저기서 지적하는 문제가 한국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통절한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식민지 지배와 싸우고 군사정권과 싸워 온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일본에서는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지식인들은 대개의 경우 식민지 지배 책임을 통절히 자기비판하지 않았고 자국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뼈에 스며들 정도의 책임감을 보여 왔다고는 할 수 없다.

인용부분③은 역사학자 이태진의 학설의 타당성을 논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셔널리즘에 빠져 있는 ‘한국’이라는 자의적인 상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는 대중문학 작가의 언설이, 또 다른 곳에서는 정대협 등의 시민운동단체의 주장이 단편적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이태진의 학설은 학문적으로 성실한 고증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고, 진지한 검토와 논의의 대상일지언정 결코 ‘무책임한 것’은 아니다.【13】

한 번 더 이 문장을 가만히 읽어보자.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 왔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

어째서 이런 난폭한 단언을 할 수 있는가? 독자는 여기에서 성실한 자기비판을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서 불성실밖에는 읽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국’을 ‘중국’이나 ‘프랑스’ 등 임의의 다른 나라 이름으로 바꿔서 읽으면, 이것이 얼마나 수상한 논법인지가 선명히 드러난다. 아무개 국가나 민족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 놓고 그 일부분을 왈가왈부 해서 전체를 포괄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부정론의 레토릭이고, 이는 ‘블랭킷 디나이얼’blanket denial (전체를 담요로 덮어 부정한다는 뜻)로 통칭된다. 그런 언사를 타국인이 쏟아내면 차별에 해당되지만, 그 나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당사자의 자기비판’인 것처럼 보인다. 박유하가 이런 단언을 굳이 할 수 있는 디딤돌은 한국에 대해서는 “자신은 오랜 유학 경험을 가진 지일인사’라는자임(自任)이고,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표상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한국내의 일부 독자는 “그 정도로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니”로 현혹되고, 일본의 독자는 “한국인 자신이 말하는 것이니”로 현혹되는 것이다. ‘우리=한국’이라는 주어에는 그 같은 효과가 도사리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박유하가 화해의 주체로 상정하는 ‘우리’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재일조선인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지배가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행사된 것인 이상, 이북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사죄와 보상 없이는 일본과 조선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의 청산이 이북, 재일조선인, 기타 재외조선인을 포함한 모든 피해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일본은 현재도 이북과는 국교조차 맺지 않은 상태다.

또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가해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리고 사죄나 보상 등이 문제가 된 적도 물론 없다. 한국내셔널리즘의 비판자를 자임하는 박유하는 ‘우리’를 ‘한국’으로 번역해도 이상해 하지 않는다. 이런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박유하는 한국이라는 국가나 그 정부로 하여금 조선민족 전체를 대표시키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듯하다.

 

④원래 지금의 일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사죄와 올바른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신이 생겼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일본이 국가보상을 행하고 천황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국립묘지에 무릎을 꿇는다 해도 지금과 같은 대일인식이 계속되는 한, 이를 여러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올 터이다. 불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든지 사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해 성립의 열쇠는 결국, 피해자 쪽이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는 가해자 쪽이 용서를 구했는지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불충분한 점은 있을지라도 큰 틀에서는 한국이 사죄를 받아들일 만큼의 노력을 일본은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14】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가령 일본정부가 1990년대에 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대일인식’도 그에 따라서 변했을 것이다.

박유하의 문장에는 원인과 결과가 의도적으로 뒤집어져 있다. 만일 일본에 대한 ‘한국’의 ‘불신’이 저자가 강조하는 만큼 심각하다 해도,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불신이 있기 때문에 사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신이 증폭되어 온 것이다. 그 같은 ‘불신’에 근거가 있다는 것은 2007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다시 증명되었다. 이 해 1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에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형태’의 책임 승인과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 하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되자 일본 우파는 위기감을 느끼고 이에 대한 반발을 강화했다.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인정한1993년의 고노(河野) 관방장관의 담화 수정을 진작부터 공언해 온 아베 신조 수상은 이때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반복했지만, 결국 엉뚱하게도 부시 미 대통령에게 ‘사죄’하는 추태를 부렸다. 일본의 우파 인사나 국회의원들은 미국의 신문에 대대적으로 의견광고를 게재했고 일본정부는 결의안 의결을 빙해하는 로비활동을 벌였다.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불신’을 한층 더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15】

이같이 현재까지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면, 일본 국가와 국민 다수가 식민지 지배를 진정으로 반성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한국이 “사죄를 받아들일 만큼의 노력을 일본은 했다”는 것은 사실에 반한다.

나는 과거에 일본에서 전쟁 책임 및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가 거의 해결되지 않는 것은 “‘타자’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자각해 이를 짊어지려는 사람들과, ‘타자를 묵살하고 자기애로 일관하려는 사람들과의 대립 때문”이며 “일본에서는 전자가 극단적으로 소수이면서 빈약하고 후자가 여전히 사회의 중추 부분을 계속 장악하고 있는 단순한 현실” 때문이라고 논한 적이 있다.【16】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는 거의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나의 지적에 대해 역사학자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壽)는 “우리들 일본인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 같은 정치 상황을 만들어왔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국민의 정치적인 식민지 책임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17】고 논한다. 이것이 객관적이고 타당한 현실 이해일 것이다.

천황 방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진짜로 “천황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국립묘지에 무릎을 꿇는” 일이 실현된다면(나는 그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대일인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천황의 사죄’하는 퍼포먼스는 현실에서 다수의 한국 국민의 인심을 ‘위무(慰撫)’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식민주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이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가 천황을 초청하는 것에도, 천황이 방한하는 것에도 나는 반대한다. 또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외국원수가 국립묘지에 참배하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은 국가주의의 강화에 다름없기 때문에 나는 반대한다.

과거의 식민지 지배는 일본의 천황제라는 제도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조선총독은 천황에 ‘직례’되어 있었다. 조선 식민지 지배의 최고 책임자는 천황이었다. 조선 식민지 지배를 근본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천황제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패전 후, 천황의 ‘위광(威光)’을 이용해서 전후 일본을 간접 지배하려는 연합국의 의향 때문에 천황제는 살아남았다. 전후 천황제는 식민지 지배와의 절연 위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전전의 천황제의 연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와 천황의 조선 행차 실현을 목표로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결국 천황 행차를 실현할 수 없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 인민의 저항이 그 만큼 끈질기고 강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일본 측에 서서 말해도 나는 우선 현행 헌법의 제1조(상징 천황제)에 반대한다. 일본 국민이 자신들의 손으로 천황제를 폐지해야 하며, 이는 침략전쟁으로 일관했던 일본의 근대와 결별하고 일본인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황제 폐지 문제는 제쳐두고 현행 헌법에 비추어봐도 천황 방한은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최악의 경우라 할 수 있다. 현행 헌법상 천황은 국가원수가 아니다. 일본 국가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는 존재다. 국가로서의 사죄는 국회 결의를 거쳐 총리가 공식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일본의 천황을 ‘화해와 평화의 사도’로 꾸며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구식민지 인민을 ‘위무’하려는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과거를 또 다시 연장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정부가 천황 방한을 추진하는 것은 천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선을 높여 국민통치를 꾀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어느 국민도 이런 일에 손을 빌려주어선 안 된다.

 

⑤피해자로서의 내셔널리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자기비판은 필요하지 않을까?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원한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져 상처를 받기 전의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18】

 

박유하는 어떤 자격으로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위안부’ 피해자, 강제연행된 노동자, 일제에 의한 탄압 피해자, 기타 피해자들이 일본에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을 대표할 권리는 한국이라는 국가에도 없다. 한국이라는 국가에 이들의 요구를 대변할 역할이 부여된다면, 이는 피해자와 그 뜻을 따르는 국민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이고 그런 한에서만 한국이라는 국가가 이들을 대표할 수 있다. 국가 자체를 위해, 허물며 정권의 이해를 위해 이 문제를 횡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유하라는 인물이 마치 피해자 대표와 같이 ‘한국’이리는 주어를 사용해 관용과 화해를  말하는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때문에”라는 이유는 대답이 될수없다. 같은 한국인” 중에도 여러 색깔이 있어 피해자성과 가해자이 복합적으로 흔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말단으로 가담한 조선인 업자에게는 물론 응분의 가해성과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군사정권 시대에 광주에 서 있었던 일반인 학쌓에 대해서도 당시의 여당정치가, 고급관료, 군인 등 지배층에는 가해 책임이 있다. 박유하라는 개인은 우리=한국’이라는 주어를 모호하게 사용하지 말고, 자신에게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이 있다고 할수있는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들을 대변할수 있는지를 가차없 이 자문하지 않으면안된다. 

 여기에서는 지면관계상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박유하는 식민지 근대화 론’에 대해 친밀감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다. 물론 군사 정권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식민지 시대에도 그런대로 형편이 괜찮았던 특권층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그런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든, 강제연행 ·강제노동 피해자든, 정치탄압 피해자든 필설로는 다할수 없는 고통과 굴욕을 경험한 피해자들을 대변할수는 없다. 하물며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고설高說을 펼 자격이 있을리가 없다. 같은한국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굳이 고설을 펴는것이라면 그야말로 피해 경험의 횡령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피해자는 내셔널리즘의 굴레”에 묶여 있는것이 아니다. 실제로 입은 피해 때문에 고통을받아 그 책임을 묻고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것이다. 가령 백보 양보해서 ‘내셔널리즘의 굴레”라는것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 ‘굴레’의 원인은 가해자쪽에 있는것이며 ‘굴레’를 풀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해자의 행동이 불가결한 것이다.

 

 모든 의미에서 피해자가 “상처를 받기전의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다. 되돌릴수 없는 가해를 앞으로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 책임승인, 사죄, 보상이 필요한것이다. 이런것들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용서를 위한 조건이  생기는것이다. 가해자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피해자가 “원한과 분노에서 해방 될수 있단말인가?

 

처음으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그 유통과 소비

 

하버드 대학교수인 이리에 아키라(入江昭)는 논단상 심사위원으로 “역사문헌이나 여론조사 등을 면밀히 조사한데다가 설득력 있는 논의를 펄치고 있다고 이 책을 평가했고, 『아사히신문』논설위원인 와카미야 요시후미(若宮啓文)는 ‘실증적으로 사실에 맞대면하는 지식과 끈기’라고 칭찬했다.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빗나간 평가다. 【19】 

박유하는 일본어판 ‘후기’에서 이 책의 간행을 위해 노력해준 사람으로 와다히루키를, 일본어 번역을 읽고 조언을 해준 사람으로 우에노지즈 코,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이들은 박유하가 책중에서 상찬하는 일본의 양섬적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포함해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거듭 다음문장을 읽기를 권한다.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 왔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묻고싶다.

당신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은 과거에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과거에 나는 지나치게 순진했던 듯하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가? 추측건대 박유하의 언설이 일본의 리버럴파에 숨겨져 있는욕구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들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사의 전과정을 통해 훗가이도,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만주국’으로 식민지 지배를 확대하면서 획득했던 일본국민의 국민적 특권이 위협받는것에 불안을 느낀다. 

 식민지 지배에 의한 자원 약탈과 노동력 착취를 통해 축적된 거대한 부가 일본국민의 경제생활이나 문화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일본 패전(조선해방) 후,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한것만 보아도 식민지지배로 축적된 부를 일본국민이 배타적으로 점유해온 것은 명백하다. 하물며 피해자쪽의 보상 요구에도 성실하게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파와 선을 긋고 있는 일본 리버럴파의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 감정과 구종주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확보하는 길은 피해자쪽이 먼저 나서서 화해를 제안해주는것이다. 

『화해를위해서』에 우에노 지즈코가  "감히 불속의 밤을 줍는다"며 극찬하는 추천사를 싣고 있는데, 그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일본의 독자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저자의 자국비판에 편승하지 않는 절도일 것이다. 일본어판을 간행하면서 저자는 일본비판을 늘렸다고 한다. 외국인 필자가, 특히 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의 국적을 가진 필자가 일본의 독자에게 듣기 좋은 정보만을 공급하여 일정한 시장을 획득하는 일도 있지만, 그마케팅 전략을 박유하씨는 뒤집은것이다. 한국내에서는 자국에 비판적으로행동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독자의 귀에 따가운것을 말한다. 이는 비판적 지성이라는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있다. 그 비판적 지성이 자신이 속하는사회를 향해 쏟는 고언을, 마치 자신들에 대한 원호사격인 것처럼 ‘영유’해서는 안된다.

 

 시장” 운운은 사실 분명히 그대로다. 그러나 ‘마케팅 전략’이라는 우에노의 말을 빌리자면, 한번 비튼 박유하의 ”전에 우에노 자신이 넘어간것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전략”을 공유했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박유하의 일본 비판은 너무 관대하다. 이는 고이즈미 수상담화에 대한 박유하의 해석을 두고 우에노자신이 지나치게 선의(善意)”의 해석이라고 언급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에서도 알 수있다. 일본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일어나고 있는사태가 불편한것은 당연하다). 박유하의 일본비판은 거의 우파의 배외적 국가주 의자나 국수주의자를 향한 비판이다(이 조차도 관대하지만). 한편,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이해와 공감을 표명한다. 따라서 우파와는 일정한 선을 긋고 있는 리버럴파에게 박유하의 언설은 ”귀에 따가운 소리”이기는 커녕, 오히려 “듣기에 좋은것 이다. 박유하의 모든 레토릭은 궁극적으로는 한일간 불화의 원인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불신에 있다는 박유하 식의 가짜 ‘화해론’으로 수렴한다. 이것이 일본의 국민주의자들에게 귀에 따가운 소리” 일리가 없는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박유하의 “자국비판은 불성실한 단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점이 리버럴파 소비자에게 시장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가치인가 하면,  “절도” 있는 “양심적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억눌러온 본심을 저자가 “자국 비판”인 것 같은 레토릭을 구사해 대변해주는 가치다. 우에노는 저자의 자국비판에 편승하지 않는 절도” 가 요구된다고 말하지만, 같은 문장안에서 “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한국 내 여성단체에 대한 (박유하의) 비판은 일본의 운동단체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비판 중의 하나다"라고 쓰고있다. 이것이 박유하식 ‘화해론’이 일본에서 소비되는 유형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하면 ‘절도”와 본심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국 비판’의 형식을 취한 것은 우에노가 말한 것 같은 ‘마케팅 전략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이 전략이야말로 이 ‘시장”에서의 시장 가치의 원천인 것이다. 게다가 이 언설은 ‘내셔널리즘 비판가부장제 비판’의 형식(어디까지나 형식’이다)까지 취하고 있다. 자신들의 본심을 대변해주는 인물이 ‘한국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중의 부적으로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이다. 리버럴리스트를 자임하는 소비자들에게 이만큼 입에 맞는 상품도 없을 터이다.

예를 들자면 치맛바람』의 저자 오선화(吳善花)가 산케이신문』 독자층인 우파의 수요를 충족시켰다면, 박유하는『아사히신문』의 독자인 리버럴파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라 할 수있다. 전자는 국가주의에, 후자는 국민주의(리버럴 내셔널리즘’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박유하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리버럴 세력의 사상적 퇴락(堕落) 현상이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리버럴 세력은 피해자 쪽(이라 자임하는 인물)의 입을빌리면서까지 승인을 받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누차 그런 승인을 피해자 쪽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화해란 진실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묻고, 책임자의 사죄를 거쳐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중반의 ‘증언의 시대’ 이후, 진정한 화해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소수파인 상태로 봉인되어 버렸다. 진정한 화해를 통해 새로운 일본’으로 거듭날 좋은 기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같은 변화의 중핵이 되어야 할 리버럴파의 지식인층이 15년이 지난 지금,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무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문제가 계기가 되어 중국이나 한국에서 반일운동이 고양될 때마다 일본의 지식인이나 미디어가 즐겨 흘려 보내는 언설은 "반일운동의 원인은 (일본이 아니라) 상대국의 내셔널리즘에 있다”는 것이다. 그 반일 내셔널리즘의 유래를 역사적인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고찰하려는 논의는 거의 없다. 후진적이고 비문명적인 ‘내셔널리즘’이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을 상정하고, 자국과 피해 민족과의 불화와 대립의 원인을 이 괴물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 안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는 국민주의를 자기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피해자 쪽에 자신들의 ‘도의적’ 정당성을 승인하도록 요구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심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 말한 구미의 기억의 격화’론과 상통하며 선진국 다수자의 심성과 공통 되어 있다. 박유하와 같이 사이에 서겠다’는 몸짓으로 가짜 ‘화해’를 설파하는 구식민지 출신 지식인들은 선진국 다수자의 수요에 응해서 앞으로도 세계 각지에 나타날 것이다. ‘글로벌화’로 구식민지 종주국과 구식민지 지역과의 경계를 넘어서는 언설 시장이 생겨나 리버럴파 국민주의의 수요에 응하는 ‘화해론’이 유통·소비되고있는것이다. 이는 결국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세계사적 조류에 대한 반동의 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은 피해자 쪽의 요구가 화해 달성을 막는 주된 장애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화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들에게 타협이나 굴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진실을 은폐함으로써 책임의 소재를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의 해결을 벌어지게 만든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조선민족에 부과된 인류사적 사명은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고있는 식민주의와의 투쟁 전선에 자신들이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여러 피지배 민족과 연대하면서 가짜 ‘화해’를 거부하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일본인들도 이 같은 투쟁에 연대해서 진정한 화해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말한 내 견해가 일본사회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독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람은 질릴 정도로 변함없는 반일 내셔널리스트다”라는 손쉬운 결론을 내리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박유하식 레토릭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는 관점이라고 지적해 둘 수밖에 없다.

 

처음으로 

한장의 그림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이 글을 거의 탈고한 후에, 잡지 『임팩션 2009년 10월호에 실린 박유하의 에세이 「사이에 선다’는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읽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1990년대의 사상과 운동을 다시 묻는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글은 그동안 박유하에게 가해진 비판에 대한 반론이 주된 내용이다.【20】 나는 이 글을 읽은 다음에도 지금까지 여기에 쓴 나의 견해에 수정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화해론’이 가진 문제점이 한층 더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 자신과 관련되는 점부터 언급하겠다. 나는 예전에 연재한 『한겨레신문 2008년 9월 12일 칼럼에서 박유하의 『화해를위해서』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21】 짧은칼럼이었지만 취지는 이 글의 내용과 거의 같다. 박유하는 내 글을 꽤 길게 인용한 뒤에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인식 자체는 물론이고 ‘일본의 다수파’ 비판이 한국의 리버럴 신문에 크게 실려 한국의 리버럴 시민이 일본에 대한 불신에 한층 더 빠져들어 불신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같은 글은 가령 서경식씨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한국의 내셔널리스트를 선동할 뿐이다.

이 비판은 오히려 박유하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비판이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박유하의 ‘한국 비판이 일본의 리버럴 신문에 크게 게재된 것이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가? 아니, 그 같은 글을 쓴 이상, 아마 박유하 자신은 지신의 언설이 일본 사회에 미치는 효과를 숙지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리버럴 시민이 일본에 대한 불신에 한층 더 빠져 들어”라고 박유하는 말하고 있지만, 나는 박유하와는 달리 ‘한국의 리버럴 시민’이 일본에 대해 품고 있는 ‘불신’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으며, 그 ‘불신’을 풀 일차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한국의 리버럴 시민’이 일본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일본 리버럴파에 대해서 오히려 과대평가나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유하가 인용하고 있는 내 글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화해라는 폭력’에는 철저히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그럴 경우 우리가 입각해야 할 지점은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갇힌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전 세계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향해 열려 있는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한 ‘전 세계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열린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에 안주하는 법 없이, 늘 ‘공감적 불안정’의 장소를 고르는 것 같은 긴장을 갖는 것일 터이다.

‘공감적 불안정’이란 박유하가 자신의 입장을 보강하기 위해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22】의 글에서 인용한 용어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대상에 공감하면서도 안이하게 동일화하지 않는 정신상태”라고 해석 해 두자.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안주란 어떤 함의일까? 

 한국이든 다른 어디든, ‘열려 있는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을 이해하지 않고 이를 왜곡해서 이용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박유하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것일까? ‘한국인가? 이미 반복해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이라는 포괄적  기술은 크게 문제가 있다. ‘한국’에도 기호화된 슬로건으로서의 ‘반식민주의’에 ‘안주하는 세력과, ‘안주를 거부하고 식민주의와 싸우는 세력이 존재한다. 내 입장은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열려 있는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이라는 말이 내 문장에서 인용한 것인 이상, 박유하의 ‘안주라는 비판은 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은 ‘안주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거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는 커녕 끊임없이 포위되고 무너지고 고립을 강요당하면서도 오랫동안의 투쟁의 결과 가까스로 2001년 더반 회의’에까지는 이르렀지만, 그 후에 다시 세계적인 반동에 위협받고 있는 지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경화의 길을 걷는 일본사회에서 ‘북조선 때리기’의 폭풍에 노출되어  있는 재일조선인의 입장이다. 학교 교문앞에서 우익들이 질러대는 “일본에서 나가라!"는욕설을 들어야 하고, 일본 다수파의 차가운 무관심에 견뎌야 하는, 학생들이 서 있는 그 지점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편재해 있다. ‘안주라고?  ‘공감적 불안정’을 강조하는 박유하에게 그 같은 입장에 대한 ‘공감적 불안정’을 한번이라도 실천할 것을 권하고 싶다. 

다음에 박유하는 에세이의 주에서 ('화해'를위해서』가) “리버럴을 자칭하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영합하려는 내용을 씀으로써 어떤 흐름을 만들려 했다”고 하는 하야오 다카노리(早尾貴紀)의 추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엇보다도 2005년의 시점에서 한일관계가 ‘화해’는 커녕 독도(다케시마) 문제 등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만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 폭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화해론을 대망(待望)하는 일본의 지식인’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근거 없는 억측의 시작인 것이다.

하야오의 추측이 옳고 그른지 여부를 떠나서, 이 문장이 정직하게 쓰여진 것이라면, 일본’에 대한 ‘한국’의 몰이해를 비난하는 박유하 자신이 얼마나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가령 한일관계로 한정해서 본다고 해도, 1965년 한일조약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대립과 긴장이 내포된 관계인 만큼, ‘화해론’에 대한 대망도 끊임없이 존재했다. 긴장이 없으면, ‘화해론’도 필요 없는 것이다. 한일관계에 대립이 나타나고, 긴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화해에 대한 대망’ 또한 높아진다. 이는 한일관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법칙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박유하 자신은 이 점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꽤 무거운 문제를 말해야겠다. 박유하는 이번 에세이의 서두에 한장의 그림을 내걸었다. 일본군 포로로 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경험한 전 네덜란드 병사가 강변에서 조선인 군속으로 보이는 인물로부터, 성적 학대와 고문을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강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두사람의 ‘일본인 간호사 가 네덜란드 병사를 향해, 야바하고 외설스럽고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박유하는 단정을 피하면서도, 그 ‘일본인 간호사‘ Japanese Nurses가 ‘위안부’였음을 강하게 암시한 다음, ‘여기에서 여성들을 안부’로 간주해도 좋다면, 우리들은 그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어떤 해석을 달아도 그것이 이미 우리에게 고착되어 있는 ‘위안부’ 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 확인은 ‘위안부=피해자라는 인식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 자신은 우선 이처럼 민감한 소재를 이 같은 ‘암시’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박유하의 솜씨에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피해자에 대한 2차, 3차 가해로 이어질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간주해도 좋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그렇게 간주해도 좋을지는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 본인이 2차 피해를 각오하고 커밍아웃하는 것과, 다른사람이 억측을 섞어 공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여기에 그려져 있는 ‘위안부일지도 모르는 여성에 대해 ‘공감적 불안정’이 기능하고 있다면, 다르게 다룰 수 있었을 터이다. 그 점을 지적해 두고 나의 감상을 말하겠다. 

 나는 여기에 그려져 있는 ’일본인 간호사를 지금으로서는 ‘위안부’로 단정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태국의 포로수용소에도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는지 여부, 또 이 그림을 이용해서 박유하가 추측하고 있는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연구자의 검증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만일 그 같은 일이 있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 같은 일도 있을 수있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결코 내 안에 있는 “ ‘위안부’ 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든, ‘군속’이든, 이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이는 새삼 말할 필요도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다. 그녀들은 민족차별, 성차별, 계급차별이 몇 겹으로 겹쳐 있는차별구조의 가장 밑바닥 젊은 나이에 내팽개쳐졌다. 게다가 귀축미영(鬼畜米英)을 내건  황국사상이 강제로 주입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녀들에게서 인간이 가질수 있는 많은 나쁜 측면이 드러났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악’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틀림없이 ‘악’이지만,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구조적인 ’악’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그림을 보고 박유하의 설명을 읽은 뒤에도 내 마음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고문 피해자인 네덜란드 병사에 대한 동정은 물론, 인간을 이렇게까지 만든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대한 비분(悲憤)이다. 따라서 적어도 내 경우에 한해서 말하자면, ‘위안부=피해자라는 인식이 뿌리째 흔들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가 떠올랐다. 레비가 만년에 쓴 에세이집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중에 「회색지대」【23】라는 것이 있다. 피해자 안에 침투해 있던 가해성이라는 문제를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고찰한 글이다. 이 글은 살아남은 사람들(나치의 피해자) 중에도 순수한 피해자라고는 할 수 없는 회색지대’가 있었다는 엄정한 자기성찰이다. 레비는 “우리들 살아남은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증인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진정한 증인이라 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우리들’ 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장소를 빼앗아 살아남은 존재라는 것이다. 같은 수인에 대한 폭력이나 도둑질 등 피해자들의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이 수용소에서 지겹도록 노출되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수용소에서 대량 살육이라는 더러운 허드렛일을 강제당하고 그 대가로 겨우 몇 주일의 수명 연장이 라는 ‘특권’(도대체 이를 특권이라니!)을 얻은 특별부대’를 쳐다보는 레비의 눈빛은 지극히 복잡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레비의 메시지를 잘못 읽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피해자에게도 가해성이 있으니 가해자를 엄정하게 취급할 자격이 없다든가, 결국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치가 특별 부대의 유대인에게 대량 살육을 돕게 한 것은 피해자로부터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는 자각”조차도 빼앗아가는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고 레비는 말한다. 레비는 나아가서 수인 중에 있었던 (나치 당국에 대한) 협력자의 행동에 ‘성급히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경솔하다. 명백히 가장 큰 죄는 체제에, 전체주의 국가의 구조 자체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수용소 체제라는 시스템으로 인간성을 파괴당한 수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성의 재건 가능성에 대해 고뇌에 찬 고찰을 우리에게 님긴 것이다. 이는 그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운용한 가해 당사자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나치의 수용 시스템과,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제도와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설령 피해자에게 가해성이 침투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운용한 자들의 가해 책임을 상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혹한지를 밝히고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박유하와 레비가 크게 다른 점은 레비는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자신의 내부를 파헤쳐 그곳에 침투해 있는 미세한 가해성까지 도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유하는 자신이 아니라, ‘위안부’라는 타자의 가해성을 폭로해 보이고 있다. 이것이 마치 ‘자기비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앞서 말한 ‘한국=우리들’이라는 용어의 레토릭 때문이다. 

 박유하가 여기에서 보여준 자료는 앞으로 연구자들이 신중하게 검토 할 것이다. 그리고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우리들에게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고찰에서 끌어낼 결론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함과 책임의 중대함이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보강하는것이 아닐 터이다.

                                                                                                                     2010년 4월

 

처음으로 

【주】

【1】서경식, 「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 2006년 1월 1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렸던 상호철학국제학회 발표, 후에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철수와영희, 2009에 수록.

【2】「徐京植, 「民族差別と『健全なナショナリズム』の危険」, 『ナショナリズムと「慰安婦」問題』, 青木書店, 1998. 후에 徐京植, 『半難民の位置から』, 影書房, 2002에 재수록

【3】板垣竜太、「植民地支配責任を定立するために」、中野敏男 편, 『継続する植民地主義』, 青弓社, 2009.

【4】永原陽子編, 『植民地責任論―脱植民地化の比較史』, 青木書店, 2009.

【5】서경식, 「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

【6】 Rosa Amelia Plumelle, “Les crimes contre l' hum킹lÍte et le devoir de reperation" .

【7】ロザ=アメリカ・ブリュメル, 「白人どもの野蛮―人道に対する罪と補償の義務」, 『前夜』 6, 2006. 이 논문을 번역하고 해설한 기쿠치 게이스케(菊池惠介) 씨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8】박유하,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뿌리와이파리, 2005(朴裕河, 『和解のために―敎科書・慰安婦・靖国・独島』, 平凡社, 2007).

【9】金富子, 「‘慰安婦’問題と脫植民地主義-歷史修正主義的な‘和解’への批抗」, 『インパクション』 158호, 2007년7월. 후에 金富子・中野敏男編,『歴史と責任─慰安婦問題と一九九〇年代』, 青弓社, 2008에 수록(한국어판은 나카 도시오·김부자 편, 『역사와 책임: 위안부 문제와 1990년대』, 선인, 2008).

【10】박유하, 앞의 책, 일본어판은24쪽, 한국어판은25쪽.

【11】 박유하, 앞의 책, 일본어판은 220쪽, 한국어판은198쪽.

【12】박유하, 앞의 책, 일본어판 226쪽, 한국어판 203쪽.

【13】李泰鎭・笹川紀勝編著, 『国際共同研究韓固併合と現代』, 明石書店, 2008.

【14】박유하, 앞의 책, 일본어판 238쪽

【15】이 같은 일본정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2007년 7월 결의안은 미하원 본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일 ‘위안부’ 사죄 요구 결의는 네덜란드, 캐나다, EU회의 본회의에서도 채택되었다.

【16】徐京植, 「『日本人としての責任』をめぐって」, 『半難民の位置から』,影書房, 2002.

【17】吉澤文寿, 「日本の戦争責任論における植民地責任─朝鮮を事例として」,『「植民地責任」論─脱植民地化の比較史』, 青木書店, 2009.

【18】박유하, 앞의 책, 일본어판 240쪽.

【19】한편, 이 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일본인의 논고는 필자가 아는 한 극히 적다. 나카노 도시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에 대한 책임」 및 「전후 책임과 일본인 주체」(나카노 도시오・김부자 편, 『역사 와책임』, 선인, 2008). 早尾貴紀, 「『和解』論批判─イラン・パペ『橋渡しのナラティヴ』から学ぶ」, 『戦争責任研究』 61호 및 早尾의 서평(『軍縮地球市民』62호)정도다. 위에서 언급한 김부자 외에 송연옥도 박유하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 두 사람 모두 재일조선인이다. 송연옥, 「식민지 여성과 탈제국의 페미니즘」, 『역사와 책임』. 후에 宋連玉, 『脱帝国のフェミニズムを求めて』, 有志舎, 2009에 재수록

【20】朴裕河「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慰安婦問題をめぐる九十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す」『インパクション』171, 2009.

【21】서경식,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 『한겨레신문』, 2008.

【22】도미니크 라카프라, 『치유의 역사학』, 푸른역사, 2008.

【23】プリーモ・レーヴィ, 「灰色の領域」, 『溺れるものと救われるもの』, 朝日新聞社,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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