読者です 読者をやめる 読者になる 読者になる

오누마 야스아키의 박유하 ‘옹호’와 와다 하루키의 박유하 ‘비판’ (정영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아시아여성기금의 경험을 통해(慰安婦問題の解決のために─アジア女性基金の経験から』(平凡社新書, 2015)와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역사 인식’이란 무엇인가(「歴史認識」とは何か)』(中公新書, 2015)를 읽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를 정면으로 논하기를 피하고 기묘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 정치적 의미는 어디쯤에 있을까. 이 문제는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를 논하는 관점과 관련한 극히 중요한 논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에서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오누마 야스아키는 일본국민의 노력이 한국에 이해받지 못하는 배경에 대해 언급하는 문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21세기가 되어 한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욱더 강경해지고 있는 인상인데, 특별히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강경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세종대학의 박유하 교수. 박 씨는 『화해를 위해』와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공간하여 아시아여성기금에 의한 보상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 측의 냉정한 논의와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을 냉정이 수용한 서평도 한국의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박 씨는 『제국의 위안부』 서술을 둘러싸고 제소당해 민사뿐만 아니라 형사고소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 문제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자세도 한국 미디어의 태도도 90년대보다 훨씬 완강해진 면도 보인다. 한국 국민에게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을 아는 세대가 적어져 오히려 관념적이고 내셔널리스틱한 반일론이 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관념적인 혐한론이 인터넷이나 일부 잡지, 서적에서 만연한 것과 정확히 대조를 이루는 듯한 관계에 있습니다.

 본래 모든 위안부나 그녀들의 둘러싸고 있는 지원단체, 한일 양 정권이나 학자, 미디어, 다양한 한일 양 국민, 나아가 국제사회를 모두 만족시키는 ‘진정한 해결’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일 양 정부가 교섭을 거듭하고 서로 양보하여 정부 간의 해결에 합의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생존 위안부를 위해서도, 한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해결’을 격렬히 비난하는 사람은 일본에도 한국에도 반드시 남겠지요.”(p.156-158)

 

 여기에서 박유하는 어디까지나 ‘반일’ 한국의 여론을 비판하고 오누마의 프레임을 증명하기 위해 호출되고 있을 뿐이다. 국민기금을 높이 평가한 것, 한국에 “냉정한 논의와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요구한 것을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기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1)

 

 한편, 와다 하루키는 어떠한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제2장 「위안부 문제란 어떠한 문제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일본에서의 위낭부 획득은 대개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간 업자가 임의로 여성들을 모아서 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업자도 국가적 체제의 일부입니다. 일본에서는 매춘부였던 21세 이상의 여성이 모아졌다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금전적인 약속 외에 ‘나라를 위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설득이 이루어졌겠지요. 따라서 이 사람들을 확실히 ‘제국의 위안부’(박유하)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때 조선, 타이완에도 여성들을 모을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중략)

 조선, 타이완에서는 그때까지 매춘부였다는 조건이 제거되어 보통 여성들이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속아서 모아졌던 것이 가장 많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가난 탓에 전차금을 받고 가는 것을 승낙한 사람도 있겠지요. 물론 매춘부였던 사람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도 ‘나라를 위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설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된 것은 우선 조선인 업자들이었습니다. 모아진 여성들에게 그러한 의식이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p.60-61)

 

 이것은 와다에 의한 『제국의 위안부』 비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와다가 염두에 두고 잇는 것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특히 한글판)에서 전면적으로 전개한 ‘위안부’들은 일본군 병사에게 ‘동지의식’을 가지고 양자는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주장일 것이다. 와다는 그러한 ‘동지의식’, 즉 일본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설득’을 받아 내면화한 것은 일본인 ‘위안부’에 한정되며, 조선인의 경우는 “그러한 의식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서에서 유일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그 기본적인 모티프(*2)를 부정하는 문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 이와 같은 박유하 ‘비판’이 삽입되었을까. 한 가지 가능성으로 와다처럼 국민기금 형 ‘화해’를 추진하려는 자들에게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가 일종의 ‘짐’이 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마이니치 신문의 야마다 다카오(山田孝男)처럼 아직까지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설을 부인한 노작”이라고 예찬하는 자도 있기는 하지만(「風知草:「帝国の慰安婦」再読」, 『毎日新聞』 2015년 7월 27일자 조간), 와다는 그래도 야마다처럼 경박하지도 무지하지도 않다. 이 책의 조악한 완성도를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래서는 한일 ‘화해’와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같이하는 자라도 찬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쯤해서 박유하를 ‘비판’하여 떼어내고 오히려 재판만을 다루어 한국 내셔널리즘 비판에 이용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러한 가설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이 가설은 너무 단순하고 일면적인 느낌도 있다. 오누마의 내용에 대한 침묵은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즉 철저하 박유하의 정치적 이용이다), 위 인용에서 명백하듯이, 와다의 박유하 ‘비판’은 단순히 떼어내려는 자로 보기에는 너무나 우회적이다. 내용상은 명백히 『제국의 위안부』 비판이지만, 그렇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박유하 씨는 ……라고 언급하지만, ……는 의문입니다”와 같이, 보다 알기 쉬운 서술방식도 가능했을 것이다. 오히려 『제국의 위안부』의 광범위한 유통을 생각하면, 잘못된 인식이 있다면,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나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에 대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명시하여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잘못된 인식은 고쳐진다. 이런 식으로는 사정을 모르는 독자는 건너뛰고 말지도 모른다. 왜 이와 같은 우회적인 서술방식을 취하는 것일까.

 

 신서 같은 것을 너무 깊게 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때로 격앙되어 대놓고 진심을 말하는 오누마와는 달리, 와다의 저작에는 항상 주도면밀히 배치된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특히 이 타이밍에서 출간된 와다의 저작이 단순한 역사학적인 ‘위안부’론일 리가 없다. 지문뿐만 아니라, 인용이나 모든 출전 표시, 즉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를 인용하고 누구를 인용하지 않는가에 모두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예를 들면 와다가 “잊지 못할 대화”로 삽입하는 다음의 에피소드도 흥미 깊게 읽힌다.

 

“이 무렵(1995년: 인용자 주) 5월 중순에 나는 서울에서 정대협 윤정옥 선생님 등과 만났습니다. 전년에 만난 후로 반년 동안 일본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공동대표인 지은희 씨와 정진성 씨가 같이 왔습니다. (중략) 나는 세 사람에게 일본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기금의 구상에 대해 설명하고, 죄송하지만 일본의 상황에서 보면 이것으로 추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눈 끝에 윤정옥 선생님은 뜻밖에도 ‘더이상 안 된다면 국민들이 모은 돈이라도 괜찮다. 정부의 대표자가 사죄와 함께 그 돈을 가지고 와서 할머니에거 건네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은희 씨도 동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젊은 정진성 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의 정부가 사죄를 하고 그 사죄를 표하는 돈을 정부가 내미는 형식이 관철되었다면 보상금의 재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일본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다는 윤 선생님의 의견은 극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진성 씨의 반발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윤정옥 선생님 자신도 정말로 그 안으로 된다고 할 정도의 확신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실현하는 데는 일본정부 쪽에 결정적인 곤란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때 순간적으로 열린 가능성의 공간에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어떠한 결론도 없이 끝났고 우리들은 헤어졌습니다.”(p.113-114)

 

 와다는 이 ‘대화’를 묘사할 때, 식민지기를 아는 정대협의 중진으로 진정한 ‘해결’을 찾는 윤정옥과, 젊고 비판적인 연구자 정진성이라는 도식을 채용한다. “잊지 못할 대화”의 정경을 묘사하고 “그때의 윤정옥”을 형상화함으로써 정대협을 나누어 국민기금적 ‘화해’로 유도하려고 한다. 이 묘사는 와다 나름의 정대협 ‘비판’인 것이다.

 

 이 점은 오누마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일독하면 알 수 있듯이, 위의 인용에서 고소에 대한 오누마의 설명은 부정확하다. 『제국의 위안부』를 제소한 것은 ‘나눔의 집’ ‘위안부’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누마는 “식민지 지배나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 의한 “관념적이고 내셔널리스틱한 반일론”으로 치환했으며 더욱이 혐한론이나 재특회와 같은 배외주의와 동렬시해 버린다. “식민지 지배나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 의한 “관념적이고 내셔널리스틱한 반일론”으로 보고 싶은 욕망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역사 인식 문제란 각국의 과도한 내셔널리즘의 문제이며, ‘해결’로의 길은 각국이 내셔널리즘을 억제하는 것이다(“혐한‧반일 오십보백보론”)라는 일본의 ‘리버럴’ 내에서는 지배적인 프레임(*3)에 『제국의 위안부』 제소를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에 무리함이 생겨 욕망이 들키고 만다. 오누마, 와다는 동일한 정치적 메시지를 발하고 있지만, 그 방법은 다르다. 와다의 책을 읽을 때에는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부터는 내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아마도 와다는 ‘나눔의 집’을 향한 메시지로서 이 기술을 삽입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 든 오누마의 매끄럽지 않은 박유하 ‘옹호’에 드러나 있듯이, ‘나눔의 집’ 여성들의 박유하 제소는 국민기금=‘화해’파에게는 뼈아픈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은 근거가 없는 비방이 아니라, 그 내용은 타당한 것이다. 와다는 거듭 당사자 여성들을 적으로 돌리게 된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 의식’에 관한 기술을 암암리에 ‘비판’하며 ‘나눔의 집’을 ‘화해’로 포섭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 점도 “그래도 그러한 ‘해결’을 격렬히 비난하는 사람은 일본에도 한국에도 반드시 남겠지요”라고 말하며, 이론파를 잘라내는 것을 명언해 버리는 오누마와는 다르다.

 

 아직까지 박유하를 띄우고 있는 자와는 달리, 와다는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가 일종의 ‘지뢰’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해’ 등등을 언론이나 사교의 재료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범백의 ‘리버럴’과는 다르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가 초래한 한국 내셔널리즘 비판‧정대협 비판의 ‘공기’는 정대협을 ‘화해’로 포섭하는 데에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박유하를 비판하여 ‘공기’를 바꾸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회적인 형태로 사정을 아는 자에게만 전달되도록 박유하 ‘비판’을 삽입한 것은 아닐까. 일본어로 출판된 서적이기는 하지만, 와다가 쓴 것이라면 곧바로 한국의 운동 관계자에게 전달될 것이고, 아마도 한글판도 출판될 것이다. 와다의 박유하 ‘비판’의 이해로서는 일단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기에서는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수법이나 내용이 너무나도 조잡하기 때문에 발생한 역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많은 박유하의 방법상의 오류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너무나도 심한 탓에 그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화해’론을 수명연장시킨다는 역설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결함은 학문적으로는 치명적인 단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박유하라는 ‘미끼’에 애가 달은 탓에 실제로는 거의 동일한 말을 하고 있는 와다의 박유하 ‘비판’에 달려들고 만다. 나도 포함해서 『제국의 위안부』의 실증적, 방법적 문제에 집중적으로 비판을 가하여 그 나름의 성과를 올린 탓에 새로이 부상한 문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눔의 집’ 사람들은 부디 조심하기 바란다.

 

*1 아울러 오누마는 이 앞 단락에서 일본의 우경화는 과도한 전쟁책임․식민지 지배책임 추궁 탓이라는 자기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우경화의 원인에 대한 오류임과 동시에 전쟁책임․식민지 지배책임을 추궁하는 일본 내 동향의 과대평가이자(역사수정주의자와 동일한 인식), 동시대사의 역사 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해서 말하면, 1995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원단체가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다거나 특별입법이 이루어져 국가보상이 성사될 것이라는 비현실적, 공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재판에서는 연이은 패소,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특별입법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직면했으며, 그 한편으로 국민․시민을 포함한 새로운 공공 이념에 대한 이해도 진전되어,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다면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시아여성기금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20년 전에 비해 이 점에 관해서는 일본의 시민사회는 확실히 성숙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편으로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진보적’ 미디어가 자신들의 정의를 내세우며 일방적이고 편향된 보고를 해 온 것에 대해 90년대부터 일본 국민의 불만이 쌓여 온 것 같아 보입니다. 그 불만이나 비판은 어느 정도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지나쳐 감정적인 혐한, 반중의 논조가 잡지나 인터넷 상에서 전개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모아서 극히 선정적인 표제로 기사를 쓴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저열한 표현으로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비난을 반복한다. 원래는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불만이나 분노가 추접한 편견으로 가득찬 언어로 발신되어 버렸다. 역사의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담론도 과거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가까이에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없어진 것도 있어서, 젊은 세대가 그러한 것을 간단히 믿어 버리기 쉬워졌을지도 모른다.”(p.155-156)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성명 「전후 70년 총리담화에 대하여」에 관한 좌담회에서도 오누마는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座談会 70年談話、学者の危機感 三谷太一郎さん、大沼保昭さん、藤原帰一さん」, 『朝日新聞』, 2015년 7월 25일자 조간)

 

“오누마: 전후 일본에서는 그때까지 오로지 피해자 의식으로 서술되었던 전쟁을 아시아에 대한 가해의 측면에서도 바라보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 자체는 바람직한 역사 인식의 다면화였습니다. 다만, 일부의 지식인이나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미디어는 일본의 전쟁책임․식민지 지배책임에 대해 과도한 윤리적 추궁을 하여 “일본은 무한히 머리를 떨구어야 한다”는 식의 풍조가 사회에 움텄다. 일반 사람들은 “중한의 주장에도 이상한 점이 있다”고 정당한 비판의 감정을 품어도, “가해자는 피해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억눌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불만은 극단적인 배외주의자로 흡수되어 버렸고, 그것이 중한에 되돌아와 더욱더 격렬한 반일의 반응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둘러싼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과도한 윤리적 추구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2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참조

 

*3 앞에서 언급한 『아사히 신문』 좌담회(*1 참조)에서 미타이 타이치로(三谷太一郎)는 “냉전 후 글로벌한 규모로 국제질서의 일종의 아나키화가 진전되어 그것이 역사 인식을 국제문제화시켰던 것입니다.” “더욱이 냉전 후는 일종의 평등 관념을 전제로 한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어 그것이 국제질서의 아나키화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라고 노골적으로 90년대 이후의 아시아의 대일 전쟁책임‧전후보상 요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냉전이란, 이른바 ‘일종의’ 서열적인 ‘국제질서’ 아래 아시아 민중으로부터의 전쟁책임 추궁을 봉쇄할 수 있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미타니의 발언에서는 이러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읽어낼 수 있다.

 

(정영환)

 

[원문] 大沼保昭の朴裕河「擁護」と和田春樹の朴裕河「批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