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문제와 1965년 체제의 재심판 ―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정영환)

『역사비평』111호、2015年여름

 

목차
1. 들어가며
2.『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3.『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
4.『제국의 위안부』의 한일협정 이해의 오류
 1) 『제국의 위안부』의 헌법재판소 결정 비판 논리
 2) 쟁점의 착오
 3) 한일회담론의 문제점① 권리를 말소한 것은 한국 정부?
 4) 한일회담론의 문제점 ② ‘경제협력’은 ‘전후보상’인가?
5. 끝으로

 

  1. 들어가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뿌리와이파리,2013. 일본어판은 朝日新聞出版, 2014)은 2013년 간행된 이래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왔다. 특히 한국에서 2014년 6월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이 책의 ‘위안부’ 관련 기술이 명예훼손에해당한다고 주장하여 출판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 ‘학문의 자유’와 개인의 ‘명예’를 내세우는 측에서 반론을 제기해 논쟁이 일어남으로써 『제국의 위안부』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소송은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의 일본어판이 2014년 11월에 간행되자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의 유력 전국지나 일본 공영방송국 NHK 뉴스에 소개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2015년 2월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승소하여 서울동부지방법원이 해당 기술의 삭제를 지시하는 가처분결정을 내리자 『제국의 위안부』는 마치 한국의 ‘반일내셔널리즘’ 분출의 희생양처럼 간주되었다. 이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사회현상으로서 『제국의 위안부』 수용과 유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책이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그 내용에 대한 검토는 현재 매우 미흡하다. 이 책은 일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런 평가들은 이 책의 내용과 방법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들을 등한시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1990년대 이래 진전된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전후보상 연구의 성과에 입각하여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검토하는 작업이 긴급하다. 이 글은 이상의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이 책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일본어판을 주된 검토 대상으로 하고 한국어판은 필요에 따라 언급할 것이다. 일본어판은 한국어판을 저자 자신이 번역한 것인데, 전체적으로 가필·삭제·수정되었기 때문에 번역이라기보다 ‘개정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 시점에서 최종판인 일본어판을 기본 텍스트로 비평하려 한다.

 

이하에서는 먼저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론상 문제점을 지적한 후 『화해를 위해서』 간행 당시의 쟁점들을 살펴보고,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 대한 이 책의 서술에 관해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하겠다. 아래에서도 지적하겠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2005년에 간행된 『화해를 위해서』의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이후의 변화로서 한일청구권협정에대한 한국 사법의 새로운 판단이 나와 소위 ‘1965년 체제’의 동요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한·일 양국 간의 한일청구권협정에 인해 구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며 이를 협정 제3조에 따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2012년 5월 24일에는 일본의 국가권력이 저지른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된 대상에 포함되지 않다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한국 사법의 이런 동향은종래 한국 정부의 한일협정 해석, 즉 ‘1965년 체제’에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2012년 10월 11일 한일회담문서의 개시에 관한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 이래 일본 외무성은 한일회담과 재산청구권에 관한 문서를 부분적으로 점차 공개하게 되어 한일회담 연구와 전후보상재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화해를 위해서』에서 박유하는 “한일협정의 불성실함을 들어 또다시 협정 체결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것이다”라고 썼다. 한일협정 체제 비판을 ‘무책임’이라 단정한 것이다.『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이런 입장을 유지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한일협정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 요지는 2011년의 헌법재판소 결정을 전면 비판하며 한일회담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렇게 ‘1965년 체제’의 동요라는 상황에 대해 비판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한일협정 해석 과정에서 박유하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나 일본군의 책임에 대한 인식도 드러나므로, 이 글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의 한일협정 분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본론에 앞서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상의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이 세부적이거나 복잡하게 뒤얽힌 논리 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검토 대상이 애매한 데다가 이용되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형식으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국민동원’이라는 말의 특수한 사용 등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 책에서 박유하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상황은 다양했다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한편, 자신은 개별적인 증언문학 작품의 묘사를 패치워크처럼 짜맞추며 추측도 섞어가면서 “그녀들은…”이라고 일반적으로 논하고 있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을 ‘동지’라고 기술한 부분은 재판에서도 문제시되었거니와, 이러한 문제점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부분의 하나이다.

 

이 책의 기본적인 시각은 조선인·대만인 ‘위안부’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등 점령지의 ‘위안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본인과 대만인을 제외하면 결정적으로 다른 존재”(76쪽. 이하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인용은 본문에 표시)였다는 것이다. 박유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체가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신민’, ‘준일본인’이었던 일본인·조선인·대만인‘위안부’, 즉 ‘제국의 위안부’로 주제를 한정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조선과 중국의 ‘위안부’가 그 피해실태상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벌써 수많은 연구가 일본군이 점령한 각 지역의‘위안부’ 징집이나 성폭력 문제에 나타나는 특징을 논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문제는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의미에서 비슷했다는 명제를 전제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다.

 

박유하는 센다 가코(千田夏光)가 소개한 어느 일본군 병사의 증언―일본인‘위안부’가 “멋지게 죽어주세요!”라고 말했다는 회고―를 소개하면서, 일본은 ‘제국의 위안부’에게 일본 군인의 신체적 ‘위안’과 더불어 정신적 ‘위안’도 요구했는데, 이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자기 존재에 대한(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한국어판, 61쪽)라고주장한다. “물론 ‘조선인 일본군’이 그랬듯이, ‘애국’의 대상이 조선이 아닌‘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일본인 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한국어판, 62쪽)는 유보를 일단 달면서도, 결론적으로는 일본군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증언에 등장하지도 않은 조선인 ‘위안부’의 의식을 추측한다는 비약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에서 문제가 된 ‘동지적관계’를 논하는 방법도 그렇다. 증언과 소설을 바탕으로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 ‘동지의식이 있었다’는 해석을 하지만, 어떤 개인이 일본군인의 추억을 말하는 것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해석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 증언의 고유성이 경시되고있는 것이다. 일본인 남성의 소설을 통해서 조선인 ‘위안부’로서 ‘그녀’의 의식, 그것도 일본군과의 ‘동지의식’의 존재를 논한다는 방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 증언에 대한 박유하의 접근 방식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박유하는 정대협이 편찬한 증언집에 기록된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해”라는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위안부의 체험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설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현실의 위안부 중에도 자신의 체험을 ‘운명’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있었다. 자신의몸을 덮친 고통을 수반한 상대를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은 갈등을 화해로 이끄는 하나의 과정을 제시하고있다. 그러한 그녀에게 그녀의 세계 이해가 틀렸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그것은 그녀 나름의 세계 이해 방법을 억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말은 갈등을 푸는 계기가 결코 체험 자체나 사죄의 유무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92~93쪽)

 

이렇게 이 ‘증언’을 최대한 평가하는 한편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고 ‘증언’한 어느 여성은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정당성에 의한 ‘도덕적 오만’”, “상대방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하는 지배욕망의 뒤틀린 형태”,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라며 최대한 매도한다(299~300쪽). 이런 글쓰기 방식은 ‘증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행위와 정반대로 ‘증언’의 찬탈 행위 아닐까.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문학 연구나 구술사 연구의 비평을 기다려야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보아도 역사서술자로서의 윤리와 대상과의 긴장관계를 놓친‘방법’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라는 20세기의 잔혹한 부정의(不正義)의 피해자들에 대한 ‘역사’를 쓰는 방식으로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1.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

 

다음으로 『제국의 위안부』의 전사에 해당하는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뿌리와이파리, 2005. 일본어판은 平凡社,2006. 후에 平凡社라이브러리, 2011. 이하 『화해』 일본어판에서 인용)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자. 『화해』는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大佛次郞 論壇賞)’을 수상하여 일본에서 주목을 받은 저작인데, 간행 당시부터 그 내용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논쟁이 있었다[i]. 『제국의 위안부』는 당시 거론된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논쟁은 일본의 언론계를 주된 무대로 했기에, 한국 독자를 위해서도 『화해』를 둘러싼 논쟁 을 소개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해』에 대한 비판은 주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위안부’연행의 강제성 문제이다. 『화해』에 대해 가장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한 김부자는 『화해』가 선행연구를 자의적으로 인용하여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강제성이나 증언의 신뢰성을 부정한 우파의 논의를 답습했다고 비판하였다[ii]. 특히 요시미 요시아키가 중국이나 동남아의 점령지에서는 “노예사냥과 같은 연행”이 있었고, 위법적인 지시를 공문서에 남겼을 리 없기 때문에 “노예사냥과 같은 연행”만 거론하는 것은 “문제를 축소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도, 박유하가 마치 요시미가 연행의 ‘강제성’을 부정한연구자인 것처럼 인용한 점을 비판하였다. 김부자는 이에 대하여 “요시미의 주장의 핵심 부분에 대해 정반대의 인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연구자 로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인용 방법이다”라고 비판하였다[iii].

 

박유하는 이 비판에 대해 요시미와 같은 입장의 연구에서조차도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과 같은 연행이 조선, 대만에서 있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사실’ 언급일 뿐 자의적인 왜곡은 아니라고 반론했다[iv]. 그러나 요시미 주장의 핵심은 ‘강제성’을 왜소화하는 주장에 대한 반박인 이상,이것을 ‘강제성에 대한 이의’의 예시로 인용하는 것은 김부자의 지적대로‘정반대의 인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협의의 강제성’으로 문제를 제한하려는 역사수정주의적 쟁점의 설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지적받았던 선행연구에 대한 잘못된 인용이라는 문제도 『제국의 위안부』에계승되고 있다.

 

둘째는 ‘위안소’ 설치의 목적이다. 박유하는 ‘위안소’는 일반 여성에 대한‘강간’을 억제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는 구조적으로 일반 여성을 위한 희생양이기도 했던 것”『화해』, 87쪽)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부자는 ‘위안소’는 일반 여성의 보호를 목적으로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중국 민중들의 분노를 사고 치안유지상의 문제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그 대책으로 설치된 것이며, 어디까지나 일본군을 위한 제도였다고 비판했다[v].

 

박유하는 이에 대해 “구조적으로 일반 여성을 위한 희생양”이라고 쓴 것은 위안부 시설의 목적을 몰라서가 아니라 ‘여성’도 ‘위안부’라는 존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반론하였다[vi]. 그러나 이 반박은 새로운 문제를 드러낸다. 여기서 ‘일반 여성’은 문맥상 전쟁터의 ‘적국’ 여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박유하는 이들이 “‘위안부’라는 존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한 셈이다. ‘위안소’는 여성에 대한 ‘강간’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강간’당할 수도 있었던 여성은 ‘위안소’라는 존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않다는 논리는 김부자의 지적대로 너무나도 앞뒤가 바뀐 견해이다.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작전 수행상 필요가 ‘우선’이었지, ‘적국’ 여성의 보호 등은 안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국의 위안부』로 이어지는 박유하의 일본군 책임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위와 같은 박유하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폭력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 군인들의 강간이 불법적인 폭력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강간’당할 수도 있었던 여성들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박유하도 병사들의 강간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 책의 논리 자체는 그런 비난을 무화시켜버린다. 군인의 강간을 ‘자연화’하여 불가피한 현상으로 상정한다면, 문제는 그 당연한 폭력을 어디에 분배할지가 된다. 그러니 전쟁터의 ‘일반 여성’이 자기 대신 강간당한 ‘위안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셋째는 국민기금에 대한 평가이다. 서경식은 『화해』의 사상적 문제점을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세계적 조류와 관련지어서 면밀히 검토하였다. 국민기금은 식민지배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구식민지 종주국의 공통된 심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한일 간의 ‘불화’의 원인을 국민기금을 부정한 정대협 등 한국 측의 내셔널리즘으로 돌리는 박유하의 주장은 ‘화해’란 이름의 ‘폭력’이라고 비판하였다[vii].

 

이 비판에 대해 박유하는 『화해』와 국민기금은 서경식이 말하는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세계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으며 “‘법적으로’ 1965년에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이 끝났다 하더라도, 1990년대에 정부가 예산의 반을출자하며 다시 보상을 한 것이었으니 ‘국가보상’의 형태를 취했으면 좋았을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썼다. 그러나 서 교수는 나의 책에 그런 지적이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고 반론하였다[viii].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서 박유하가 국민기금의 ‘쓰구나이금(償い金)’을 ‘보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가 지적했듯이,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의 ‘쓰구나이금’은 ‘보상’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해왔다. 국민기금 부이사장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는 “이것은 배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ODA처럼 인도적 견지에서 일정한 지원 협력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다[ix]. ‘쓰구나이금’이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이 서경식의 비판의 핵심인데, 박유하는 일괄적으로 이들을 ‘보상’이라고 총칭하면서 이 쟁점을 해소해버리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이런 쟁점들이 『제국의 위안부』에서 어떻게 거론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1. 『제국의 위안부』의 한일협정 이해의 오류

1) 『제국의 위안부』의 헌법재판소 결정 비판 논리

 

『제국의 위안부』 제4장 「한국 재판소의 판결을 읽는다」는 전술한 2011년 8월의 헌법재판소 결정(이하 「결정」)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장이다. 박유하의 주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을 인용해보자.

 

이 청구의 근거는 최초에 있는 대로 ‘부녀매매금지조약’을 일본이 위반했다는데 있다. (…) 그러나 인신매매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업자였다. 일본 국가에 책임이 있다면 공적으로 금지하면서 실질적으로 (…) 묵인한 (…) 데에 있다. 그리고 후에 보듯이 이런 ‘권리’를 말소한 것은 한국 정부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 외교통상부는 피해자가 일본의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움직이는것은 정부의 의무가 아니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강하게 반론하였다.(180쪽)

 

 즉 박유하의 주장은 인신매매의 주체는 ‘업자’였으며 그 책임을 일본 국가에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국에는 수요를 만든 책임(때로는 묵인한 책임)밖에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적 책임을 전제로한 배상 요구는 무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91쪽)고 주장한다. “수요를 만든 책임”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일본군은 장기간에 걸쳐서 병사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란 존재를 발상하고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요의 증가야말로 속임이나 유괴를 횡행시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타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장기간 전쟁을 함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일본은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 (…) 위안부의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면 모집 자체를 중단해야 했을 것이다. 수백만의 군인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수의 ‘군용 위안부’를 발상한 것 자체에 군의 문제가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군의 책임은 강제연행의 여부 이전에 그러한 ‘묵인’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책임이 무거운 것은 ‘군’ 이전에 전쟁을 시작한 국가다.(32쪽)

 

일본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존재를 발상”하여 “수요”를 만들어내고 유괴를 “묵인”한 것에 한정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역할은 “묵인”이나 “발상”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본질은 공식적인 지휘 명령 계통을 통해‘위안소’ 설치를 지시하여 여성의 징집을 명령한 것이었다[i]. 또한 ‘위안소’를 군의 ‘병참 부속시설’로 규정하여 공적으로 운영·관리에 관여한 것이었다[ii]. 박유하는 한편에서는 업자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견해를 비판하지만 사실상 일본군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위의 인용은 어떻게 보면 ‘공급’이 따라갈 정도였다면 군위안소 제도 자체에는 문제가없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데, 업자의 일탈만 문제 삼는다면 군위안소라는 제도 자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이다.

 

다만 이 책에는 일본 정부나 일본군의 명령으로 인해 ‘위안부’들이 징집되었다, 즉 ‘위안부’의 연행에 일본군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있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국가―대일본제국이 군인을 위해 동원한 위안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77쪽), “군대화된 위안부의 모습이 전쟁으로의 국민 총동원의 또 하나의 모습”(110~111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박유하는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여성의 징집, 공권력을 통한 연행을 예외적인 일로 해석한다. 그렇기에 ‘동원’ 혹은 ‘국민동원’은 일반적인 어법과 다른 독특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핵심적인 개념들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애매한 평가도 이런 방법상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책임 주체도 ‘일본군’, ‘일본’, ‘일본국’ 등을 특별한 설명 없이 혼용해서 쓰는가 하면, 다른 한편 ‘군’과 ‘전쟁을 시작한 국가’의 책임을 나누어서 논하기도 한다.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위안부들을 강제노동과 비슷한 형식으로 혹사시킨 것은 군인들만이 아니라 업자들이기도 했다”(105쪽), “한 명의 위안부에게 하루 수십 명의 상대를 시켰던 것은 단순히 일본 병사의 압도적인 수와 강제 때문만이 아니다. 업자들 또한 그런 군의 수요에 협력,더구나 솔선해서 과중한 노동을 강제하였다”(107쪽), “감금, 강제노동, 폭행에 의한 심신의 상처를 만들었던 것은 업자들이기도 하였다”(113쪽)라고 쓰고 있다. 업자의 행위를 강조하는 문맥이기는 하지만 군이 ‘혹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을 논하는 차원에서는 그것들이 업자에게 전가되면서 책의 내적인 정합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이다.

 

2) 쟁점의 착오

 

박유하의 「결정」 비판의 특징은, 이상에서 보았듯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하여 사실관계의 수준에서 일본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논리의 바탕에는 헌법소원의 쟁점에 대한 착오가 있다. 원래헌법소원의 쟁점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 여하가 아니라,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가 규정한 ‘해결을 위한 조치’를 한국 정부가 취하지 않았다는 부작위가 헌법 위반인가 아닌가에 있었다. 그러나 박유하는 『화해』의 논의를 답습하여 ‘업자 주범설’을 전개하면서 일본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박유하는 일본군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수요’를 만든 책임 혹은 인신매매를 ‘묵인’한 책임이며, 이런 행위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박유하는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입장은 피청구인이었던 한국 정부와는 다른 것이다. 박유하는 “5년이나 걸렸던 재판 끝에 재판소는 소송자들 편에 섰다. 재판소는 일본 국가만이 책임주체라는 생각에 동조한 모양이다”(180쪽)라며, 마치 한국 정부가 자신과 같은 입장인 것처럼 썼는데, 피청구인인 한국 정부는 박유하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국 외교는 청구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정」이 인용했듯이 한국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는 일본 정부가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하고 있다(2005년 8월 26일 ‘민관공동위원회’ 결정). 「결정」에 소수의견을 표한 법관의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한국 정부의 의무에 대해 논했던 것이다. 청구인의 배상청구권 자체를 부정한 자는 없었다.

 

박유하가 배상청구권을 부정할 근거로 참조한 것은 변호사인 아이타니 구니오(藍谷邦夫)의 논문[iii]인데, 여기에도 앞서 언급한 요시미 논문의 자의적인 인용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 박유하는 아이타니의 논문을 인용하여 “가령 인신매매를 일본 국가 주도로 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손해보상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 “결국 정대협이 주장하는 법적 배상의 근거는 없다”(194~195쪽)고 단정한다. 그러나 아이타니는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이타니는 국제법에 기초한 일본군 ‘위안부’ 재판의 원고측 주장을 검토하는 문맥에서 위법성의 근거로서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언급하며 ‘위안부’ 제도를 위법행위로 인정할 근거가 된다고 평가하는 한편, 이 조약은 어디까지나 위법성의 근거에 불과하기에 손해배상 그 자체에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iv]. 박유하가 배상청구를 부정하기 위해 인용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러나 이상의 아이타니 논문의 요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타니는 어디까지나 배상에 대해서는 다른 법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법상 개인의 청구권이 최근 수년간 인정되어왔음을 지적한다. 즉 이전까지 일본 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근의 갖가지 인권조약은 개인의 국제법상 법 주체성을 당연시할 정도까지 심화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v]. 헤이그조약 및 ILO조약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 정부는 개인이 국제법상 주체가 아니라는 논리로 배제해왔지만, 이런 논리는 최근 인권조약의 발전을 일탈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개인의 법주체성을 인정하는 조류의 존재를 지적한 논문을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부정한 연구인 것처럼 인용하는 ‘정반대의 인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3) 한일회담론의 문제점① 권리를 말소한 것은 한국 정부?

 

전술했듯이 박유하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권리’를 말소한 것은 한국 정부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에서 여성들의 권리(청구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위안부들의 다수가 가혹한 인권유린적 상황에 있었던 사실이 확실한 이상,그것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어떤 모양의 사죄와 보상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개인이 피해보상을 받을 권리를 박탈한 것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는 사실, 그리고 90년대에도 다시 한 번 일본 정부에 의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상당수의 위안부가 일본의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지 않고 있는 것 같다.(193쪽)

 

여기서 “90년대”의 “일본 정부에 의한 보상”이란 국민기금, 즉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가리킨다. ‘쓰구나이금’을 ‘보상’이라 부르는 박유하 어법의 문제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보상’임을 부정하고 있는데도 왜 ‘보상’으로 취급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도 없다.

 

또한 여기서 ‘위안부’ 여성들이 보상받을 기회를 한국 정부가 스스로 포기했다는 박유하의 주장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한일회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일 것이다.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던 ‘청구권’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한일회담 연구의 중요한 쟁점인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의의 여부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기때문이다. 최근에 공개된 한일회담 관계문서를 보아도, 1953년의 회담에서 한국 측 위원이 점령지에서 인양한 조선인의 ‘예탁금(預託金)’을 논의하는 맥락에서 해군의 관할하에 싱가포르 등 남방에 위안부로 갔다가 돈이나 재산을 남겨 귀국한 사람이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vi].

 

그러면 박유하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전개했는가. 『제국의 위안부』가 참조한 것은 김창록의 「1965년 한일조약과 한국인 개인의 권리」라는 논문이다[vii]. 이 논문은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한국인 개인의 권리에 대해 한일 간에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를 한국 측의 문서 검토를 통해 밝히려 시도한 논문이다. 이 물음에 직접적인 답을 주는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실마리’가 되는 기록은 있었다고 한다. 바로 1961년의 예비회담 및 제6차 회담에서의 ‘피징용자’에 관한 한일 간의 교섭이다.

 

좀 더 자세히 검토해보자. 예비회담에 앞서 한국 측은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을 작성해 변제를 청구할 ‘청구권’으로 5항목을 제시했다. 그중 ‘피징용인 미수금’에 관해 일본 정부는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법을 기준으로 개별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했는데, 한국 측은 정상화 이전에 일본법 외의 새로운 기초, 즉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보상’을 한국 정부에게 일괄적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박유하는 김창록이 소개한 이 교섭 사실을 들어 “한국 정부가 이때 일본 의견을 받아들여 개인 보상 부분을 남겼다면 다른 피해자들도 ‘적법’한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188쪽)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박유하의 해석이 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김창록이 검토한 한일 간의 의제는 ‘피징용자의 미수금’이며 ‘위안부’ 문제가 아니었다.김창록이 지적했듯이 여기서 일본 측대표 제안의 취지는 일본법상 유효하게 성립한 것으로 보상을 한정하는 것이었다[viii]. 관련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고 한국인이 일본 국내의 법적 절차를 밟아 보상을 지급받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사실상 보상을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도 있는 주장이었던 것이다[ix]. 일본 측 공개문서를 검토한 연구를 보아도, 일본 측은 강제동원된 노동자나 군인 군속의 보상 문제에 대해 ‘법률적 근거’가 없다며 한국의 보상 요구를 거부하고, 지불이나 조사의 대상을 어디까지나 ‘군인 군속 징용자’의 ‘미불금’이나 ‘은급(恩給)’으로 한정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x]. 일본법은 당연히 ‘위안부’를 군인이나 군속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조건하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해도 보상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오히려 김창록은 한국 측 대표가 회담에서 논의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이후 청구권 행사의 여지를 남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제6차 회담에서 한국 측은 청구권요강의 내용과 관련하여 “요강 제1항 내지 제5항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한일회담 성립 후일지라도 개별적으로 행사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이유는 “의제에 들어 있지 않는데도 이 회담이 성립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개인 청구권이 없어지게 된다면 그것도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따라서 이 경우에는 회담과는 관계없이 개인 간의 청구 또는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xi].그러나 일본 측은 회담에서 청구권 문제를 최종적으로 종결시키려는 입장을 고집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김창록은 한국 측 대표가 청구권 행사의 여지를 남기려고 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박유하는 다시 그와 정반대의 주장, 즉 한국 정부가 스스로 ‘위안부’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김창록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4) 한일회담론의 문제점 ② ‘경제협력’은 ‘전후보상’인가?

 

박유하의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이해의 문제점은 또 있다. 주지하듯이 한일협정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의 의사를 표현한 문구가 들어 있지 않다. 박유하는 이런 한일협정의 ‘한계’를 초래한 원인을 다음과같이 설명한다.

 

신기하게도 [한국 정부의] 인적 피해에 대한 요구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징용과 징병에 한정되어, 돌연한 종전으로 회수되지 못한 채권 등의 금전 문제가 중심이었다. 즉 1910년 이후의 36년에 걸친 식민지배에 의한 인적 정신적 물적사항에 관한 손해가 아니라 (…) 1937년 전쟁 이후의 동원에 관한 요구였던것이다. (…) 한일회담의 배경에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어디까지나 전쟁의 뒤처리―문자 그대로 ‘전후처리’를 위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배상금은 다 한국 정부로 넘기고 국가가 개인청구에 응하는 모양이 되었다.(248~249쪽)

 

여기서 박유하가 청구권협정상 ‘경제협력’을 ‘배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정부는 막대한 배상을 하면서도 조약에는 한마디도‘식민지 지배’나 ‘사죄’, ‘보상’이라는 문구를 쓰지 않았다. 즉 사실은 보상금인데도 명목은 보상과 관계없는 것처럼 되었던 것이다”(247쪽)라고 쓴 것을 보아도 박유하가 ‘경제협력’을 ‘배상’, ‘보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에 대해 “배상 혹은 청구권의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경제협력”이라고하여 ‘배상’임을 부정한 바 있다[xii]. 박유하는 이 지점에서 국민기금의 ‘보상’에 대한 접근법과 같은 구도의 문제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경제협력’을 ‘배상’으로 간주했던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한일협정 체결 당시의 한국 정부가 그런 해석을 취했다. ‘경제협력’은 청구권문제 ‘해결’의 대가이기에 ‘경제협력’은 배상이라는 논리다[xiii]. 그런데 김창록에 의하면 이런 한국 정부의 ‘경제협력=배상’론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제2조를 애초부터 한국병합조약이 무효임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병합무효론’를 전제로 한 ‘경제협력’이기에 ‘배상’이라는 해석을 취했던 것이다[xiv].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병합’이 법적으로 유효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에 1965년 당시의 한국정부와도 입장이 다르다.

 

박유하의 논리는 이렇다. 한일협정에 ‘사죄’의 문구가 없는 것은 이것이 ‘인적 피해’에 관한 ‘제국 후’ 보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후’ 보상이었기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전후’ 보상이란 1937년 이후의 ‘전쟁에 대한 배상금’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박유하의 전후보상 이해의 특이성이 있다.

 

그런데 과연 한일청구권협정의 ‘경제협력’은 ‘전후보상’, 그것도 1937년이후의 전쟁에 대한 ‘배상금’이었을까. 선행연구가 지적해왔던 것은 오히려 한일회담이 연합국과 일본의 ‘전쟁’을 둘러싼 배상교섭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일회담과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이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a)는 일본국, 일본국민과 조선, 대만 등의 지역 주민의 ‘청구권’ 처리를 양 당국자가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제4조(a)의 ‘청구권’을 둘러싼 교섭은 ‘전쟁’ 손해의 교섭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오타 오사무(太田修)가 지적하듯이 제4조의 ‘청구권’이란 개념은 “일본과 연합국에서 제외된 한국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규정했을 뿐이고 식민지 지배나 전쟁으로 인한손해와 배상의 청산을 규정한 개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xv].

 

박유하가 선행연구의 성과를 일탈한 독특한 주장을 전개하면서 근거로 삼았던 것은 장박진의 저작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질 수 없었는가』이다[xvi]. 이 책은 한일회담에서 과거 청산 문제가 왜 ‘소멸’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한국 정부의 교섭 전략과 한일회담을 둘러싼 국제환경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노작이다. 박유하가 의거한 것은 한국 정부의과거 청산 구상을 검토한 이 책의 6장 1절이었다.

 

장박진이 여기서 분석한 것은 1949년 9월에 이승만 정권이 작성한 「대일배상 요구 조서」(이하 「조서」)이다. 「조서」는 배상 청구의 정당성의 근거로서 1910년부터 45년까지의 일본의 조선 지배가 ‘자유의사에 반한 일본 단독의 강제적 행위’임을 제시했다. 따라서 선행연구는 「조서」가 식민지배를 총체적으로 문제 삼아 배상을 요구한 문서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장박진은 「조서」가 구체적인 배상 요구의 범위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기간의‘인적 물적 피해’에 한정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이렇게 배상 청구 대상을 한정한 것은 대일강화조약에서 배상 문제가 어디까지나 연합국과 일본의 전후 처리라는 틀 안에서 처리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장박진은 애초부터 한국 정부에는 식민지배의 책임을 포괄적으로 추궁할 의사가 없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xvii].

 

여기서 ‘1937년의 전쟁동원’에 대한 ‘배상금’이라는 장박진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1949년 한국 정부의 교섭 방침에 관한 것이며, 박유하의 주장과 달리 1965년에 한일 간에 체결된 ‘경제협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장박진은 한국 정부가 회담 시작 이후에는 중일전쟁 이후의 전쟁 피해에 관한 배상조차 충분히 주장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당연히 ‘경제협력’이 ‘배상금’이라는 입장도 아니었다. 반대로 장박진은 앞서 살펴본 1965년 당시 한국 정부의 ‘경제협력=배상’론을 강력히 비판한다. 회담 당시에 한국 정부는 그런 주장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xviii]. 여기에서도 박유하는 근거 문헌의맥락과 전혀 다르게 문헌을 인용하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1. 끝으로

 

이상 주로 한일협정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검토하였다. 다시 정리하면 박유하는 책에서 일본 정부에‘법적 책임’은 없다는 전제하에 ①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에게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없고, ② 가령 있었다 해도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포기했으며, ③ 대신에 한국 정부가 받은 ‘경제협력’은 중일전쟁 이후의 전쟁에대한 ‘배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아무 근거가 없고 선행연구를 ‘정반대’로 인용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는 그 정치적인 제안의 옳고 그름 이전에 최소한의 논증 수준에서 방법상 치명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개념 정리부재, 상호간 모순적 서술의 혼재, 자의적인 ‘증언’의 선택과 선행연구의 오용 등 심각한 방법론적 오류를 지닌 이 책이, 왜 일본의 지식인들 특히‘리버럴’을 자임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호평을 받았는가? 『화해』가간행되었을 때 서경식은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xix].

 

그들(일본의 리버럴―인용자)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 반대하며, 자신들이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자임한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홋카이도,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그리고 ‘만주국’으로 식민지배를 확대하면서 근대사의 전 과정을 통해 획득된 일본 국민의 국민적특권이 위협받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 우파와 선을 긋고 있는 일본리버럴파의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 감정과 구종주국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 확보하는길은 피해자 쪽이 먼저 나서서 화해를 제안해주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유통과 소비구조 또한 위와 같은 서경식의 지적을 회피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자’로서 ‘명예 감정’을 유지한 채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소리를 부정하려고 하는 ‘욕망’에 이 책은 잘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기 쉬운 역사수정주의자와는 거리를 두는 ‘리버럴’지식인들과 역사주정주의의 은밀한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표면상 종래의 전쟁책임론의 한계를 극복하여 식민지배 책임의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한 저작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에는 식민주의 비판이 없다. 한일회담을 논할 때 박유하는 한국 정부가 얼마나 식민지배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강조한다. 이것은 필자도 동의하는 확실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유하는 이 ‘1965년 체제’를 재심판하려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보는 것이며 그 위에 그 한계를 극복할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런 시대적 한계를 검증하여 보완하는 것이다”(252~253쪽)라고 주장한다.

 

그 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인가. 책을 읽어도 그에 대한 답은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1965년 체제’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굳건한 입장이다. 박유하는 한일협정 재협상론에 대해 “일부의 학자가 주장하듯이 한일협정 자체를 흔드는 것은 너무나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러면 학술적 법적 논의가 정치적 논의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논의는 현재의 관계를 근본에서 파괴할 일이기에 양국 관계를 지금 이상으로 망가지게 할 것이다”(252쪽)라고 우려한다. 본론에서 보았듯이 박유하가 부정하는 것은 한일협정의 재협상뿐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은 협정에 따른 협상마저도 부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1965년 체제’의 수호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65년 체제’를 수호하는 박유하의 입장을 헌법재판소 결정의 이하의 지적과 대비해보자[xx].

 

특히, 우리 정부가 직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의 실현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회복에 대한 장애 상태를 초래한 데는 청구권의 내용을 명확히 하지않고 ‘모든 청구권’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이 사건 협정을 체결한 우리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 장애 상태를 제거하는 행위로 나아가야 할 구체적 의무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즉 한국 헌법재판소 결정은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기에 거기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협정을 체결한 이상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주장하는 박유하와, 헌법재판소 결정의 논리 중 어느 쪽이 ‘책임’있는 판단인지는 분명하다. 아베고키(阿部浩己)가 지적한 것처럼 ‘1965년 체제’의 반성을 요구하는 이런 사법판단들에는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 최근 한국의 사법 판단의 새로운 조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불법행위에 대한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사법 판단처럼 “21세기를 ‘또 한 번의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의 다음 세기에 걸맞는시대”로 꾸리기 위해 “과거를 소환하는 조류”, “식민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21세기는 있을 수 없다는 사조”의 하나인 것이다[xxi].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입장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1965년 체제’를 수호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박유하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계기로 한 한일외교는 “한일관계를 악화시켰을 뿐이었다”(196쪽)고 혹평하지만, 식민주의 극복의 과제를 ‘악화’시키는 것이 과연어떤 사상인지, 저자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영환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 사화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이지가쿠인대학교양교육센터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의 관심사는 패전 이후 일본의 식민주의와 재일조선인의 현대사이다.대표논저로 『朝鮮独立への隘路 在日朝鮮人の解放五年史』가 있다.

 

[i] 吉見義明, 「‘從軍慰安婦’政策における日本國家の指揮命令系統」, VAWW-NET Japan 編,『日本軍性奴隷制を裁く―二○○○年女性國際戰犯法廷の記錄 第三卷 ‘慰安婦’·戰時性暴力の實態 I. 日本·朝鮮·台湾編』, 綠風出版, 2000.

[ii] 永井和, 「陸軍慰安所の創設と慰安婦募集に關する一考察」, 󰡔二十世紀硏究󰡕 創刊號, 2000.군위안소를 ‘병참 부속시설’이라고 규정하는 법적 근거는 1937년 9월 29일의 陸達 第四八號‘野戰酒保規程改正’이었다. 『日中戰爭から世界戰爭へ』, 思文閣出版, 2007.

[iii] 藍谷邦雄, 「時評 ‘慰安婦’裁判の經過と結果およびその後の動向」, 󰡔歷史學硏究󰡕 八四九號,2009. 1.

[iv] 위의 글, 36쪽.

[v] 위의 글, 36쪽.

[vi] 吉澤文壽, 「日韓請求權協定と‘慰安婦’問題」, 前掲, 『‘慰安婦’バッシングを越えて』.

[vii] 김창록, 「1965년 한일조약과 한국인 개인의 권리」,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편, 『외교문서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2. 의제로 본 한일회담』, 선인, 2010.

[viii] 위의 글, 250쪽.

[ix] 위의 글, 250쪽.

[x] 太田修, 「時評 日韓會談文書公開と『過去の克服』」, 『歷史學硏究』 908, 2013. 8. 청구권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吉澤文壽, 「日韓會談における請求權交涉の再檢討―日本政府における議論を中心として」, 『歷史學硏究』 920, 2014. 7도 참조.

[xi] 김창록, 앞의 글, 251쪽.

[xii] 山口達夫, [外務省條約局條約課] 「經濟協力」, 『時の法令別冊 日韓條約と國內法の解說』, 大蔵省印刷局, 1966, 45쪽.

[xiii] 한일협정 비준 당시 국회에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의 답변(1965. 8. 5). 『第五十二回國會 韓日間條約과諸協定批准同意案審査特別委員會 會議錄』 5, 18~19쪽.

[xiv] 김창록, 앞의 글, 240~242쪽.

[xv] 太田修, 『日韓交涉』, クレイン, 2003, 77쪽.

[xvi] 장박진,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질 수 없었는가』, 논형, 2009.

[xvii] 위의 글, 247쪽.

[xviii] 위의 글, 524쪽.

[xix] 徐京植, 「和解という名の暴力」, 93쪽.

[xx] 헌법재판소 HP에서 인용(http://www.ccourt.go.kr/home/storybook/storybook.jsp?eventNo=

2006%C7%E5%B8%B6788&mainseq=111&seq=13&list_type=05, 2015년 5월 3일 최종

확인).

[xxi] 阿部浩己, 「日韓請求權協定·仲裁への道」, 『季刊戰爭責任硏究』 80, 2013 夏季,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