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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마저 ‘망각’하는 박유하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지난 328일에 도쿄대학 고마바(駒場) 캠퍼스에서 제국의 위안부평가를 둘러싼 토론회가 열려 나도 발표자로 등단했다(추기 참조). 토론회에서는 여러 의미에서 흥미로운 발언을 접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쓰고자 한다.

 

그런데 이 토론회 개최에 앞서 박유하가 자신의 facebook에 나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게재했다. 지금까지보다 한술 더 뜬 우스꽝스러운 반론을 전개하고 있어 소개하고 간단히 의견을 남겨 둔다.

 

박유하는 내가 제국의 위안부부정확하게 요약해서 비판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하며 그 구체적인 예로 도로 노리카즈(泥憲和)에 의한 아래의 지적을 인용한다(읽기 쉽도록 적당히 행을 바꾸었다).

 

나는 한국어판을 읽지 못하므로 일본어판에 입각해서 서술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만 보면, 정영환 씨의 비판 수법은 미리 제국의 위안부를 완전히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한 후에 그 결론에 맞춰 이런저런 단편을 끌어맞추고 있으며, 게다가 부정확한 인용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례를 들면,

 

    정영환 씨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 원문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과 연민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병사의 관계가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견을 배반하는 차별을 내포하면서도.”

 

구조적기본적으로, 그리고 ‘ ’가 붙은 동지적 관계가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동지적 관계로, 더욱이 한 문장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영환 씨는 왜곡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도로 노리카즈는 이렇게 내가 제국의 위안부원문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도로가 나의 제국의 위안부한국어판 인용을 일본어판 인용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아마도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해서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사를 쓴 시점에서는 아직 일본어판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어판에서 인용했다. 도로가 읽은 책과 기술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구조적기본적으로, 그리고 ‘ ’가 붙은 동지적 관계가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동지적 관계로, 더욱이 한 문장이 삭제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박유하 자신이 일본어판 출판 당시에 그렇게 개정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고 도로가 느낀다면 그 비판은 박유하 자신에게 향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박유하는 내가 제국의 위안부전체적인 논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는 비난이 실제로는 자신한테 향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도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명백히 끌어낼 수 없는 주장을 자작의 요약이라고 제시하며 비판자의 오독을 비난하는 놀랄 만한 반론법을 반복해 왔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스스로가 일본어판에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지조차 망각해 버린 것이다. 일종의 재능이라고 해야 할까.

 

추기

 

이전에도 썼지만, 한국에서는 교수 직위가 아니어도 전임직 대학교원을 교수라 부르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어쩌면 비전임직에도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경험상 시간강사였을 때 교수라 불린 적은 없다). 한겨레등의 신문에서 내 직함(준교수)교수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이러한 습관 자체는 어떨까 싶지만, 적어도 일본어판 번역 기사에서 어쩔 수 없이 직위를 쓸 필요가 있을 때는 정확히 게재해 주기를 바란다.

 

(정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