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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도서출판등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결정

■목차
 1.기초 사실
 2.당사자의 주장

 

서울동부지방법원 제21민사부 결정

사건 2014카합10095 도서출판등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채권자:1. 이옥선 2. 김군자 3. 김순옥 4. 유희남 5. 강일출 6. 정복수 7. 박옥선 8. 김외한 9. 김정분
   채권자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율 담당변호사 양승봉, 홍장미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지향 담당변호사 이상희, 박갑주, 김수정,정연순, 백승헌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해마루 담당변호사 김진국, 장완익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소명 담당변호사 정재훈, 박민정
채무자:1. 박유하 2. 정종주 채무자들 소송대리인 변호사 김관기

 

주문

1. 채무자들은 별지 1 ‘도서목록’ 기재 도서 중 별지 2 ‘인용목록’의 밑줄 친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서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2. 채권자들의 나머지 신청을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1/10은 채권자들이, 나머지는 채무자들이 각 부담한다.

 

신청취지
[주위적 신청취지]
1. 채무자들은 별지 1 ‘도서목록’ 기재 도서(이하 ‘이 사건 도서’라 한다)의 출판, 발행,인쇄, 복제, 판매, 배포, 광고를 하여서는 아니 되고,
2. 채무자 박유하는 채권자들과 채권자들 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접근 및 취재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예비적 신청취지1)]
1) 채권자들이 추가한 예비적 신청취지 제1항은 주위적 신청취지 제1항을 질적으로 일부 감축하여 하는 신청에 지나지 아니하고 (더욱이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제2항 부분은 주위적 신청취지와 예비적 신청취지가 완전히 동일하다), 민사집행법 제

1. 채무자들은 이 사건 도서 중 별지 3 ‘신청목록’의 밑줄 친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를 하여서는 아니 되고,
2. 채무자 박유하는 채권자들과 채권자들 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접근 및 취재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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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1. 기초사실
기록 및 심문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소명된다.
가. 채권자들은 1932년경부터 1945년경까지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본군 병사 등을 위하여 강제로 성행위를 종용당한 사람들이고2), 채무자 박유하는 이 사건 도서의 저자이며, 채무자 정종주는 자신이 운영하는 도서출판 뿌리와 이파리를 통해 2013. 8. 12. 이 사건 도서를 출판하였다.
나. 이 사건 도서에는 별지 3 ‘신청목록’ 기재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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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사자들의 주장
가. 채권자들의 주장 요지
① 채무자들은 이 사건 도서에서 ㉠ 일본군 위안부는 모집에 응하여 자발적으로 성을 제공한 매춘을 하였다거나,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이자 전쟁의 ‘협력자’로
표현하였으며, ㉡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고, 일본군 위안부들에 305조에 의하면 법원은 채권자가 신청한 범위 안에서 신청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가처분의 정도나 방법을 직권으로 정할수 있는 것이어서 위 예비적 신청을 소송상의 예비적 신청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이하에서는 이를 따로 나누어 판단하지 아니한다.

2) 채권자들에 대하여 ‘일본군성노예’라는 명칭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性的)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는 점, 이 사건에서 당사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 등을 고려하여, 이하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대하여 일본국이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등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하였으며, ② 채무자 박유하는 채권자들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하여 의도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청취한 다음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왜곡하여 사용할 개연성이 있으므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막고자 신청취지 기재와 같은 가처분을 구한다.

나. 채무자들의 주장 요지

1) 이 사건 도서의 출판․배포 등의 금지를 구하는 부분에 관하여
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엄격한 요건 하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는데, 이 사건 도서는 학술 서적으로서 표현의 자유 및 학문의 자유의 영역에 속하므로 원칙적으로 출판 금지 등과 같은 사전억제가 이루어져서는 아니 되며, 이 사건 도서는 채무자 박유하의 학술적인 의견을 담고 있어 채권자들이 문제 삼는 표현들은 사실의 적시에해당하지도 않는다.
나) 일본군 위안부는 최소한 수만 명에 이르고, 개별적인 피해의 정도가 같지 않으므로, 이 사건 도서로 인해 채권자들 개개인의 명예가 훼손되지 아니한다.
다) 설령 이 사건 도서의 내용이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하더라도, 채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사건 도서를 집필․출판한 것이고, 그 내용이 진실한 사실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에 해당하여 위법성이 조각된다.

2)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부분에 관하여
채무자 박유하는 채권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채권자들에게 접근한 바 없고, 채권자들 이외에도 접근금지를 구하는 대상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특정되지 아니하였으며, 채권자들이 타인에 대한 접근금지를 구할 권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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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사건 도서의 출판 금지 등을 구하는 부분에 관한 판단(채무자들에 대하여)

가. 관련 법리

1) 명예는 생명, 신체와 함께 매우 중대한 보호법익이고 인격권으로서의 명예권은물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타성을 가지는 권리라고 할 것이므로 사람의 품성, 덕행,명성, 신용 등의 인격적 가치에 관하여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인 명예를 위법하게 침해당한 자는 손해배상 또는 명예회복을 위한 처분을 구할 수 있는 이외에 인격권으로서 명예권에 기초하여 가해자에 대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침해행위를 배제하거나 장래에 생길 침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침해행위의 금지를 구할 수도 있다.다만, 표현행위에 대한 사전억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검열을 금지하는 헌법제21조 제2항의 취지에 비추어 엄격하고 명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허용된다고 할것인바, 출판물에 대한 발행․판매 등의 금지는 위와 같은 표현행위에 대한 사전억제에 해당하므로 원칙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다만 그와 같은 경우에도 그표현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그것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피해자에게 중대하고 현저하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그와 같은 표현행위는 그 가치가 피해자의 명예에 우월하지 아니하는 것이 명백하고, 또 그에 대한 유효적절한 구제수단으로서 금지의 필요성도 인정되므로 이러한 실체적인 요건을 갖춘 때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사전금지가 허용된다(대법원 2005. 1. 17.자 2003마1477 결정 등 참조).한편, 표현행위의 사전금지는 위와 같이 예외적으로 엄격한 요건 아래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위 각 요건에 대한 소명책임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채권자들에게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대법원 2005. 1. 17.자 2003마1477 결정, 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2) 학문의 연구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함으로써 이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노력이므로 그 연구의 자료가 사회에서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체계와 상반되거나 저촉된다고 하여도 용인되어야 할 것이다(대법원 2007. 5. 31. 선고 2004도254 판결 등 참조). 또한 양심의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은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할 수 있는 것이고(대법원 2010. 12. 9.선고 2007도10121 판결 등 참조), 인격권으로서의 개인이나 단체의 명예 보호라는 법익과 학문의 자유의 보장이라는 법익이 충돌하였을 때 그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구체적인 경우에 사회적인 여러 가지 이익을 비교하여 학문의 자유로 얻어지는 이익․가치와 인격권의 보호에 의하여 달성되는 가치를 형량하여 그 규제의 폭과 방법을 정하여야 할 것이고, 공적인 관심사가 된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표현에 대하여서는 피해자의 명예 못지않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 역시 보호되어야 하며, 또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에도 한계가 있어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아니한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대법원 1998. 2. 27. 선고 97다19038판결 등 참조).

3)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사실을 적시하는 방법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의견을표명하는 방법으로 행해질 수도 있는바, 어떤 의견의 표현이 그 전제로서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는 물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전취지에 비추어 어떤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이로써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를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면 명예훼손으로 되는 것이다(대법원 2002. 1. 22. 선고 2000다37524 판결 등 참조). 그리고 여기서 어떤 표현이 사실을 적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하는 것인가, 또는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하는 것이라면그와 동시에 묵시적으로라도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구별은 당해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과 아울러 일반인이 보통의 주의로 그 표현을 접하는 방법을 전제로 거기에 사용된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 전체적인 흐름, 문구의 연결 방법 등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고, 여기에다가 당해 표현이 게재된 보다넓은 문맥이나 배경이 되는 사회적 흐름 등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대법원 1999. 2.9. 선고 98다31356 판결, 대법원 2008. 1. 24. 선고 2005다58823 판결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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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본군 위안부의 ‘성노예’이자 ‘피해자’로서의 지위

1) 소명사실
기록 및 심문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소명된다.

가) 일본군은 1932년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 병사에 의해 강간사건이 빈번하면서 현지인들의 반발과 성병 등의 문제로 이어지자 그 방지책으로서 이른바 ‘위안소’를 최초로 설치하여 위안부를 두기 시작하였고, 1937. 7.부터 중일전쟁으로 병력을 중국으로 다수 송출하면서 점령지에 군 위안소를 설치했는데, 1937. 12. 남경대학살 이후 그 수가 증가되었다. 일본군은 1941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중 동남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점령지역에서도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수는 8만 명에서 10만 명 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중 80%는 조선 여성이었고, 나머지는 필리핀,중국, 대만, 네덜란드 등지의 여성들이다.

나) 1992. 1.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일본군 위안부 징집에 직접 관여한 관계 공문서가 발견되고, 피해자가 출현함에 따라, 일본국 정부는 진상 조사에 착수하였다. 1993. 8. 4. 일본국 정부는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일본군 위안부의 이송에 관하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였으며,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에 관하여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하였으나, 이 경우에도 감언이나, 강압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다수 있고,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으며,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음을인정하며, 문제의 본질이 중대한 인권 침해였음을 승인하며 사죄하는 내용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다)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지속적인 연구활동을 수행하여 왔는데,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문 1994/45에 의거하여 1994. 3. 4. ‘여성에 대한
폭력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ca Coomaraswamy)이 1996.1. 4.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설치한 것은국제법 위반으로서 일본국 정부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 보관 중인 관련 자료의 공개, 서면을 통한 공식사죄, 교과서 개정, 책임자 처벌 등을 권고하는 6개 항의 권고안을 제시하였으며, 1996. 4. 19. 제52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위 보고서의 채택결의가 있었다.
또한, 1998. 8. 12.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는 게이 맥두걸(Gay J. McDougall) 특별보고관의 보고서가 채택되었는데, 위 보고서에서는, ‘강간센터(rape center, rape camp)’라 할 수 있는 위안소에서 강제로 성적 노예 상태에 빠뜨려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하여 일본국 정부의 법적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위안소 설치에 책임이 있는 자들의 처벌문제와 일본국 정부의 배상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한편 유엔인권이사회는 2008. 6. 12.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각국의 권고와 질의를 담은 실무그룹보고서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으며, 유엔 B규약인권위원회는 2008.10. 30. 제네바에서 일본국의 인권과 관련된 심사보고서를 발표하고, 일본국 정부에 대
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
라) 우리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국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고 그 감시 아래 일본군의 ‘성노예’를 강요당한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국에 대하여 가지는 배상청구권은 헌법상 재산권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근원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침해와 직접 관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배상청구권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양국 간 해석상 분쟁을 위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작위가 위 피해자들의 중대한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어위헌이라고 판단하였다(헌법재판소 2011. 8. 30. 선고 2006헌마788 결정).

마) 채권자들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性的)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정부에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생활안정지원대상자’로 등록된 사람들이고, 위안부로 동원될 당시의 상황 및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1) 채권자 이옥선은 “15살이던 1942. 7.경 조선인 남자 2명이 ‘잔말 말고 가자’며 입을 막고 트럭에 실어 납치당하였고, 중국 연길의 일본군 부대 내 막사에서 강간을 당하였다. 평일엔 적을 땐 1~2명, 보통 10명 정도를, 주말에는 30~40명의 군인을 받았다. 위안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은 군인(헌병)을 불러 폭행하였고, 입는 것과 먹는 것 역시 처참한 수준이어서 군인들이 밥을 남기면 위안부들은 그것을 먹었고, 군인들이 그마저도 남기지 않으면 굶었다.”고 진술한다.

(2) 채권자 박옥선은 “18살이던 1941년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군대천막 같은 것이 씌워진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기차에서 내려서는 군대차를 타고 일본군 부대와는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안소에서 하루에 10~15명 이상의 일본군인들을 상대하였으며, 군인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빨래를 하러 나갈때도 군인들이 감시했다.”고 진술한다.

(3) 채권자 강일출은 “16살이던 1943년 가을경 보국대를 뽑는다는 일본순사에게 강제로 끌려 고향 상주에서 중국 심양을 거쳐 목단강까지 가게 되었고, 목단강에 내려서는 군대차를 타고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 군의관으로부터 부인과 검사를 받았다. 몸이 아플 때도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장티푸스를 앓게 되자 군인들은 나를 태워 죽이려고 산에 데려가기도 했다.”고 진술한다.

(4) 채권자 김군자는 “17살이던 1942년 군복을 입은 남자에 의해 중국 훈춘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많게는 하루에 4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고, 매주 금요일 군의관이 성병검사 등을 하였다. 생리를 해도 쉬지 못했고, 군인들이 많이 오는 날에는 하루에도 40명을 받았다. 일본말을 못 알아들었다가 일본군 장교에게 맞아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고 진술한다.

(5) 채권자 김순옥은 “20살이던 1942년경 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한 조선 남자의 말에 어디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중국 목단강으로 가게 되었다. 도망치다 잡히면 죽기 때문에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고, 같이 있던 위안부 중에는 자살한 여자도 있다.”고 진술한다.

2) 판단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관련하여서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일본군의 직접적인 폭력, 납치 등으로 인해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연행 되었으며, 위안부 수송과정에서 일본군이 직접 개입하였거나 군의관이 직접 이들의 건강상태를 검진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채무자들이 이 사건 도서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를 모집함에 있어 민간 업자 등이 기망, 인신매매 등과 같은 구체적 모집행위를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들이 군부대 등에 부속된 위안소에 끌려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어 저항을하게 되면 일본군 등이 폭력․협박 등을 통하여 이를 제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설치․운영하고 이를 통제하였으며, 식민체제 하에서 헌병 및 경찰등과의 연계를 통해 수만 명 이상의 위안부를 효율적으로 동원하였고, 그 수송과정에서도 깊이 개입하였다는 점에서 일본국 및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할수는 없으며, 이는 앞서 본 것과 같은 유엔 인권소위원회의 각종 보고서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 등에서도 인정된 역사적 사실에 해당한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들은 제대로 된 의식주를 보장받거나 휴식시간을 가지지도 못한 채 하루에도 많게는20~3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매를 맞거나 심한 경우는 죽임을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보면, 채권자들과 같은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본의 매춘부와는 질적으로 달리, 대부분이 10대 내지 20대 초반의 여성들로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국과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동원 되어 그 감시 아래 전시 상황의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설치된 위안소에 갇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하며 성적 쾌락의 제공을 강요당한 ‘성노예’에 다름없는 ‘피해자’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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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채권자들 등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국의 법적 책임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군은 채권자들 등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연행, 위안소의 설치․운영 등에 직․간접적으로 광범위하게 개입하였는데, 위안부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 동원된 위안부의 규모, 위안소에서의 ‘성노예’ 생활 실태 등에 비추어 볼때, 일본군에 의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위안소 설치․운영 등은 노예제를 금지하는 국제관습법과 1930년 체결되어 일본국이 1932년 비준한 강제노동 폐지를 규정한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조약 등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뉘른베르그 국제군사재판소조례 및 당해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승인된 국제법의 제원칙, 즉 인도에 대한 죄에 해당하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범죄행위)라 할 것이다. 또한 민간업자들이 기망, 인신매매 등을 통해 위안부를 직접 모집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본군은위안소를 설치․운영하고, 위안부를 국외송출하는 과정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등의행위를 통해 민간 업자들의 위와 같은 약취, 유인행위에 대하여도 형법상 공범으로서의 책임을 부담한다. 따라서 일본국은 국가기관인 일본군의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해 채권자들 등과 같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겪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이를배상할 책임이 있으며, 이는 근원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침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사이에 체결된 1965. 6. 22. ‘국교정상화를 위한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이라 한다)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이에 따라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아가 설령 일본군 위안부들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일본군 위안부들의 개인청구권 자체가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소멸한다고 볼 수도 없다(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헌법재판소 2011. 8. 30. 선고 2006헌마788 결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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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 사건 도서 중 채권자들의 인격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내용으로서 삭제를 명하는 부분

1) 채무자들은 이 사건 도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유괴하거나 강제연행한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민간 업자들에 의해 일어난 일로서, 공적으로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강제연행’의 주체가 아니었고, 위안소 운영 과정에서의 감금, 억압 역시 민간 업자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중에는 원래 매춘업에 종사하던 사람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로서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대가가 예상되는 것이었으므로, ‘강제적 매춘’의 본질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당시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동원되어 ‘애국’한 존재로서 일본군에 대하여 ‘협력자’ 혹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서술한다.

즉, 채무자들이 집필하였거나 출판한 이 사건 도서 중 별지 2 ‘인용목록’의 밑줄친 부분(이하 ‘이 사건 인용부분’이라 한다)은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있어서 영리성이나 비강제성을 강조하거나, 일본군 위안부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성행위를 강요당한 ‘성노예’에 다름없는 ‘피해자’라는 본질은 외면한 채 일본군 위안부를 19세기 후반 해외 성매매에 종사한 일본국 여성들을 가리키는 ‘가라유키상의 후예’라고 하거나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의 고통과 다르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에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들은 모집에 응하여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제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국에 대한 ‘애국심’ 또는 위안부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일본인 병사들을 정신적으로 위안하여 주는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군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동지’의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에 ‘협력’하였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앞서 본 위안부 강제동원 및 위안소 운영 등에 있어서의 일본국의 광범위한 관여사실, 일본군 위안부의 ‘성노예’이자 ‘피해자’로서의 지위 등에 비추어 보면, 이와 같은 내용은 채권자들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를 현저하고 중대하게 저해하는 사실의 적시이거나 적어도 묵시적으로 그 전제가 되는 사실적시를 통해 채권자들의 인격권 및 명예권을 중대하게 침해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은 내용은 진실이 아니거나 그것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피해자에게 중대하고 현저하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경우라고 할 것이므로, 채무자들이 가지는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비교․형량하여 보더라도,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을 상대로 이 사건 인용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서는 이 사건 도서의 출판, 배포 등의 금지를 구할 피보전권리가 있고, 이 사건 인용부분을 삭제하지 않은 채 이 사건 도서가 계속하여 판매․배포되는 경우 채권자들의 명예나 인격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그 보전의 필요성도 인정된다.

2) 이에 대하여 채무자들은, 이 사건 도서로 인해 채권자들 개개인의 사회적 평가가 저해되지 않으므로 채권자들이 직접 채무자들에 대하여 이 사건 도서의 출판금지등을 구할 피보전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명예훼손의 내용이 그 집단에 속한 특정인에대한 것이라고는 해석되기 힘들고 집단표시에 의한 비난이 개별구성원에 이르러서는비난의 정도가 희석되어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에 이르지않는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에는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할 것이지만,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구성원 수가 적거나 당시의주위 정황 등으로 보아 집단 내 개별구성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때에는집단 내 개별구성원이 피해자로서 특정된다고 보아야 하고, 그 구체적 기준으로는 집단의 크기, 집단의 성격과 집단 내에서의 피해자의 지위 등을 들 수 있다(대법원 2006.5. 12. 선고 2004다35199 판결 등 참조).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90.11. 16.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발족과 1991. 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의 공개기자회견 이후부터인데, 대한민국 정부는 1993. 6. 11. ‘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통한 지원사업을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는238명 정도에 불과하며, 현재 생존하여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53명인 점, 우리사회의 일본군 위안부 개개인에 대한 관심도 등을 고려하면, 채권자들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개개인이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특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채무자들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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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이 사건 도서 중 나머지 부분의 출판금지 등을 구하는 신청에 관한 판단

기록 및 심문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채권자들의 인격권(명예권)과 채무자들이 가지는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비교․형량하여 보면, 채권자들이 현재까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채무자들에 대하여 별지 3 ‘신청목록’ 중 이 사건 인용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각 부분을 포함하여 이 사건 도서 전체의출판, 배포 등의 금지와 같은 표현행위의 사전금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하였는지에 관한 소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소명할 자료가 없다.

1) 이 사건 도서 중에는 한국 및 일본 등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 등과 같은 채권자들의 인격권(명예권)과 무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특히 이 사건 도서 중 제3부), 그 내용이나 전후의 문맥,글의 취지 등에 비추어 볼 때, 채무자 박유하의 단순한 의견의 표명으로 보일 뿐,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거나 비유적 표현에 불과한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

2) 이 사건 도서는 채무자 박유하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내용을 그 주
된 내용으로 하고 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검열을 금지하는 헌법 제21조 제2항
및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제22조의 취지 등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출판물에
대한 발행․판매 등의 사전금지는 매우 엄격한 요건 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3) 채권자들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진 역사적 의미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 도서에 담긴 내용은 채권자들과 같은 일
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가의 문제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토론
과 비판을 통해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영역에 해당하고, 채무자들이 이 사건
도서를 집필․발행한 주된 목적이나 동기는 채권자들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기 위한 것
이라기보다는 한일 양국 사이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한편, 채무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및 위안소의 설치․운영 등에 대한 일본국의 법적 책임을 부정하고, 일본국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다고 서술하는 부분에 관하여 본다.

앞서 다.항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국은 채권자들 등과 같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입은 신체적, 정신적 손해에 대해 이를 직접 배상할 책임을 부담한다고 할 것이고,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며,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행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12. 5. 24. 선고2009다22549 판결 등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들은 이 사건 도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있어 민간 업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일본국이 채권자들 등과 같은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직접적인 ‘국가책임’을 부담하지 아니하고, 설사 그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청구권협정을 통해 소멸하였으며, 일본국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보면, 위와 같은 서술은 구체적 사실의 적시라기보다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채무자 박유하의 단순한 의견 표명으로서 헌법상 보장되는 학문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있다고 보이고, 이러한 견해에 대해 법원이 사전적으로 그 표현을 금지하기 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등을 통하여 시민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은 충분히 이러한 해결이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채무자들이 주관적으로 일본국의 채권자들에 대한 ‘국가책임’을 부정한다고 하여 채권자들에 대한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객관적으로 저하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5) 또한 앞서 라.항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이 사건 도서 중 채권자들의 명예 및 인격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일부 내용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도서의 출판,배포 등을 금지하는 가처분을 명하고 있고, 이와 같은 가처분으로도 채권자들은 가처분 신청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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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부분에 관한 판단(채무자 박유하에 대하여)

먼저 채권자들에 대한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부분에 관하여 보건대, 채권자들이 현재까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채무자 박유하가 채권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채권자들에게 접근하거나 취재를 한다는 점을 소명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소명할 자료가 없으므로, 채권자들의 이 부분 신청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또한 채권자들 이외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부분에 관하여 보건대, 채권자들이 이 부분 신청에서 접근 및 취재 금지를 구하는 대상은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채권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해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대상은 특정되었다고 할 것이나, 설령 채무자 박유하가 위 나머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들에게 접근 또는 취재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채권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전속되는 권리이므로, 채권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기하여 임의로 그 침해금지를 구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어서, 채권자들의 이 부분 신청은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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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그렇다면 채권자들의 채무자들에 대한 출판금지 등 가처분신청은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신청은 이유 없으므로 이를 기각하며, 채권자들의 채무자 박유하에 대한 접근금지 등 가처분신청은 이유 없으므로 이를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2015. 2. 17.
재판장 판사 고충정
판사 황병호
판사 최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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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1 도서목록
제목 : 제국의 위안부
저자 : 박유하
출판사 : 뿌리와이파리
ISBN : 9788964620304

 

별지2 인용목록

순번 내용
1  19쪽  센다는 ‘위안부’를, ‘군인’과 마찬가지로, 군인의 전쟁 수행을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도운 ‘애국’한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다. 국가를 위한 군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은 있는데 왜 위안부에게는 없느냐는 것이 이 책의 관심사이자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센다의 시각은 이후에 나온 그 어떤 책보다도 위안부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2  32쪽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3  33쪽  ‘위안부’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조선인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의 고통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4  38쪽  그에 따라 업자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가라유키상’같은 이중성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
5  38쪽  그러나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수요를 만든 것이 곧 강제연행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6  61쪽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7  62쪽  “응모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몸이 된 나도 군인들을 위해 일할 수있다, 나라를 위해 몸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네들은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로워져서 내지에 돌아가도 다시 몸 파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군인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돈도 벌고 싶었겠지만요.(26쪽)”
물론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 역시 ‘일본제국의 위안부’였던 이상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8  65쪽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정신적ㆍ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랑도 싹틀 수 있었다.
9  67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 봐”라는 말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그녀들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10 99쪽   버마의 양곤(랑군)에 있다가 전쟁 막바지에 폭격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했던 이 위안부 역시 일본군의 안내로 일본까지 왔다가 귀국한 경우다. 이들이 ‘전쟁범인’, 즉 전범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이유는 이들이 ‘일본군’과 함께 행동하며 ‘전쟁을 수행’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설사 그들이 가혹한 성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라고 해도 ‘제국의 일원’이었던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11  112쪽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경제활동이 가능한 문화자본을 갖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업에 종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구조 속의 일이다.
12  120쪽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13  130쪽  아편은 하루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대부분은 ‘주인’이나 상인들을 통한 직접사용이었다. 군인과 함께 사용한 경우는 오히려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4  137쪽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같은 ‘제국일본’의 여성으로서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5  158쪽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그런 유의 업무에 종사하던 여성이 스스로 희망해서 전쟁터로 위문하러 갔다”든가 “여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기무라 사이조)고 보는 견해는 ‘사실’로는 옳을 수도 있다.
16  160쪽  오히려 그녀들의 ‘미소’는 매춘부로서의 미소가 아니라 병사를 ‘위안’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애국처녀’로서의 미소로 보아야 한다(『화해를 위해서』).
17  160쪽  식민지인으로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민간인’‘여자’로서, 그녀들에게 허용된 긍지 – 자기 존재의 의의, 승인-는 “국가를 위해 싸우는 병사들을 위로해주고 있다”(기무라 사이조)는 역할을 긍정적으로 내면화하는 애국심뿐이었을 수 있다.
18  190쪽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 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 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했다.
19  191쪽  그러나 국가가 군대를 위한 성노동을 당연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았던 이상 그것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자체를 국가와 군이 지시하지 않는 이상(일본군의 공식 규율이 강간이나 무상노동, 폭행을 제어하는 입장이었던 이상) 강제연행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일본국가에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폭행이나 강제적인 무상노동에 관한 피해는 1차적으로는 업자와 군인 개인의 문제로 물을 수밖에 없다.
20  205쪽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
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21  206쪽  그녀들이 해방 후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즉 ‘더럽혀진’ 여성을 배척하는 순결주의와 가부장적인식도 오랫동안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단지 성적으로 더럽혀진 기억만이 아니다. 일본에게 협력한 기억, 그것 역시 그녀들을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더럽혀진’ 식민지의 기억은 ‘해방된 한국’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22  206쪽   그런 한, ‘피해자’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양말을 신겨주고 우산
을 받쳐주던 사람들이, 그녀들이 일본옷을 입고 일본이름을 가진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똑같은 손으로 그녀들을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23  207쪽  협력의 기억을 거세하고 하나의 이미지,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미지만을 표현하는 소녀상은 협력해야 했던 위안부의 슬픔은 표현하지 못한다.
24  208쪽  홀로코스트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갖는 모순, 즉 피해자이자 협력자라는 이중적인 구도는 없다.
25  215쪽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죄했고 2012년 봄에도 다시 사죄를 제안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정대협이 주장하는 국회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 이유는 1965년의 조약, 그리고 적어도 ‘강제연행’이라는 국가폭력이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 행해진 적은 없다는 점, 있다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여서 개인의 범죄로 볼 수밖에 없고 그런 한 ‘국가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26  246쪽  1996년 시점에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7  265쪽  조선인 위안부는 같은 일본인 여성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다.
28  265쪽  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가 ‘전쟁’을 매개로 한, 명확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식민지배하에서 동원된 ‘제국의 피해자’이면서, 구조적으로는 함께 국가 협력(전쟁 수행)을 하게 된 ‘동지’의 측면을 띤 복잡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29  291쪽  ‘조선인 위안부’란 “이렇게 해서 조선이나 중국의 여성들이 일본의 공창제도의 최하층에 편입되었고, 아시아 태평양전쟁기의 ‘위안소’의 최대 공급원”(110쪽)이 되면서 생긴 존재였다.
30  294쪽  그들이 그렇게 전쟁터에까지 함께 가게 된 건 똑같이 ‘일본 제국’의 구성원, ‘낭자군’으로 불리는 ‘준군인’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31  294쪽  그녀들이 ‘낭자군이라고 불렸던 것은 그녀들이 국가의 세력을 확장하는 ‘군대’의 보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2 294쪽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였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33  296쪽  그리고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34 306쪽   중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일본의 적국 여성들의 ‘완벽한 피해’의 기억을 빌려와 덧씌우고, 조선 여성들의 ‘협력’의 기억을 벗겨낸 소녀상을 통해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와 국가의 희생자였던 ‘위안부’를 또 다시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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